밖에서 보기에 서울대 출신은 협동심이 부족하단다. 그래서 신이 서울대생에게 조별과제 할 운명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평생 놀지 못하고 살아온 한(恨)을 담아 조별과제가 ‘팀플레이’가 되고, 21세기 신인류가 신봉하는 만물이음절화 법칙에 따라 ‘팀플레이’가 다시 ‘팀플’이 되었다. 그런데 이 팀플이란 것이 자칫하면 대학을 위협하는 괴물이 될 수 있다.

학생은 다 알고 교수만 모르는 (또는 교수도 알고 모른 척하는) 비밀은 팀플이 무임승차를 방임한다는 것이다. 운 좋게 드림팀이 결성되지 않는 한, 팀 안에서 역할과 노력의 불균형이 생기게 마련인데, 누가 더 큰 부담을 지는가는 결국 절박성의 원칙에 따라 정해진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더 절박한 사람이 나설 수밖에 없으므로 학점과 속세를 초탈한 누군가에게는 늘 고고하게 묻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반대로 다른 팀원이 제 몫을 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점수를 잘 받을 수 없는 것이 또한 팀플이다. 따라서 팀플은 공평하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팀플을 통해 세상 사는 지혜를 배우게 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원래 그런 게 아니다. 학교 밖 무한경쟁 사회에서는 팀프로젝트에서 묻어가는 일이 오히려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 평가하는 쪽에서는 팀 평가와 개인 평가를 혼동할 리 없고, 평가받는 쪽에서는 한 개인의 잘못으로 팀 전체가 피해 보는 상황을 방치할 리 없다. 아니 설령 세상에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이 넘친다 해도 대학 강의실에서 그런 세상을 미리 가르쳐서는 안 된다. ‘교육적’이라는 명분으로 문제를 알고도 방관하거나 알아서 해결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팀플 중에 가장 흔하고 문제적인 유형이 조별발표다. 조별발표는 불공평을 방임할 뿐 아니라 수업 내용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데, 심하면 수업시간 전체를 잡아먹기도 한다. 조별발표에 의존하는 수업은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조별발표의 성적반영율이 너무 높으면 앞서 말한 이유로 평가의 엄정성을 확보할 수 없고, 높지 않으면 높지 않은 대로 문제가 발생한다. 수업시간을 평가와 별 상관없는 일로 보낸 셈이 되기 때문이다. 성적이 수업의 전부는 아니라 해도 성적의 구조는 수업의 구조와 긴밀히 상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업에서 이룬 성취를 성적으로 환산하는 제도가 존립할 수 없다.

조별발표는 무엇보다 교수의 무임승차를 조장한다. 수업을 조별발표로 채우면 교수는 그만큼 편해진다. 그리고 학생들도 적당히 만족스러워 한다. 어쨌든 나가서 말할 기회가 생기는데다가 배우가 수시로 바뀌어 아무래도 덜 지루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발표토론식 수업을 위해서는 교수가 강의식 수업 때보다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은 완벽하지 않으므로, 아! 그리고 우리 대부분 또한 완벽하지 않으므로, 조별발표는 교수를 시험에 들게 한다. 학생 몇 십 명을 몇 조로 나누어 몇 번 돌려야 15주가 지나가는지를 계산하는 단계에 접어들면(교내 교수식당에서 신원미상의 두 남자가 이런 계산 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다), 학생의 숫자, 노동량과 총 수업시간 사이에 성립하는 등식에 의해 교수의 수업 중 노동량은 사실상 영에 수렴한다. 수업 준비에 쓰이는 노동량 또한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다.

팀플이 꼭 필요한 수업이나 전공도 있을 수 있다. 발표를 시킬 당위성이 있는 대형 강의, 목표 달성을 위해 공동 작업이 불가피한 과제에는 그래도 팀플이 최선일 것이다. 평가의 사각지대를 줄이는 방법 또한 없는 것은 아니다. 그룹 평가와 개별 평가를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소지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심지어 불공평을 원천 봉쇄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수업에서는 팀플에 대해 실제로 전방위적인 평가를 한다고 한다. 교수가 각 팀을 평가할 뿐 아니라 팀원 개개인이 다른 팀원들을, 청중이 다시 팀원 개개인을 평가한다는데, 이 정도면 바깥세상에서 행해지는 ‘리얼’ 팀프로젝트에 가장 근접하는 평가 모델일 듯하다. 이 ‘완전한’ 모델은 모든 전공에 보편적으로 적합한 것은 아니나 낭만적 협업의 환상을 여지없이 해체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계몽적이다. 팀플 자체에는 영혼이 없으며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교수의 몫이다. 영혼 없는 팀플은 자신을 창조한 주인에게 버림받은 괴물과 다름없다. 괴물은 창조되지 않는 편이 낫다.

대학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지적 감동과 영감을 주어야 한다. 물론 감동과 영감이 교수가 수업의 짐을 혼자 진다고 배가되는 것은 아니다. 꼭 교수의 천재성과 완전무결함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학생은 교수의 노력하는 모습에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찾아온 봄, 강단에 선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오늘 하루 학생들을 마주하기 위해 얼마나 비장하게 노력했는가. 어떤 이유로 수업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우리의 강의실은 정말 다들 안녕한가.

김현진 교수(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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