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서양철학의 문장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문장이 그대로 서술되어 있는 책은 그가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이지만 이 문장을 이끌어낸 사유 전체가 담겨 있는 책은 1641년에 출간된 『성찰』이다. 『성찰』은 서양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전으로 세상에 나온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활발하게 읽히고 연구되고 있다. 과연 『성찰』이 어떤 사유를 담고 있기에 고전이라 칭해지며 지금까지 읽힐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서양근대철학을 가르치는 이석재 교수(철학과)의 연구실을 찾았다.

 

고전으로서의 『성찰』

 

이 교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고전이란 “인간이 살면서 공통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제시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그런 노력의 결과들 가운데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서 탁월한 노력이었다고 평가되는 것들이 고전으로 남는다”고 덧붙였다. 이런 관점에서 『성찰』은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힌다. 『성찰』이 쓰인 시기는 근대과학이 등장했지만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기독교적 세계관이 남아 있던 때였다.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두 세계관이 충돌하는 가운데 ‘인간이 자신을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통합된 세계관이 없는 상황에서 데카르트가 택한 방법은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찾아 세계를 이해하는 기초로 삼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이를 위해 ‘방법적 회의’를 실시한다. 이 교수는 “‘방법적 회의’란 모든 것 가운데 보다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는 과정이며 지금까지 기초로 여겨온 것들을 의심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데카르트는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지금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육체의 존재도 신뢰할 수 없다. 심지어 ‘1+1=2’와 같은 단순한 수학적 인식도 만약 전능한 악령이 있다면 우리가 속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데, 의심이란 행위는 이를 가능케 하는 인간의 의식 활동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또 의심하고 있는 ‘나’도 존재해야 하므로 ‘나의 존재’가 확증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원리가 되며 ‘의심’은 ‘생각’ 중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성립된다.

그러나 의심 불가능한 명제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이에서 나아가 새로운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앞서 의심스러운 것으로 판단됐던 수학적 인식이나 육체의 존재, 감각에 대한 신뢰성이 회복돼야 했다. 이는 ‘신 존재증명’을 통해 가능해진다. 만약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완벽하기에 ‘나’를 속일 이유를 갖지 않을 것이다. 또 완벽한 신은 선한 신이기 때문에 내가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을 방지해 줄 것이다. 이런 효과를 지닌 ‘신 존재증명’을 간단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최고로 완전함’이란 의미를 내포한 신 관념은 최소한 그만큼 완전한 원인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인 ‘나’는 그 원인이 될 수 없기에 신 관념의 원인으로서의 신이 존재해야 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 세상을 탐구할 발판을 마련한 데카르트는 이 기반 위에 근대적 세계관을 특징으로 하는 자신의 이론 체계를 세운다. 그 이론 체계의 바탕은, 방법적 회의의 결과로 드러난 정신과 육체의 분리였다. 방법적 회의의 과정에서 ‘육체로서의 나’가 의심되며 배제되었기에 회의의 결과인 ‘의심될 수 없는 나’는 ‘정신으로서의 나’이다. 정신이 ‘나’의 본질이 되면서 육체, 즉 물질에 우위를 점했고 정신과 물질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로 해석됐다.

이 교수는 구체적인 이론을 설명하며 “중세의 세계관이 감각을 토대로 ‘색’, ‘감촉’ 등을 물체들의 성질로 봤다면 데카르트는 ‘크기’, ‘형태’, ‘운동 여부’ 등 기하학적 요소만을 물체들의 성질로 인정했다”고 말했다. 이는 이성(정신)으로 파악하는 기하학적 요소를 육체에서 비롯한 감각성질보다 중시한 것이다. 또 이 교수는 “중세까지 운동하는 물질은 본래 그러려는 목적을 가져 운동하는 것으로 이해됐지만 데카르트는 물질이 법칙에 따라 작용할 뿐이라는 기계적 세계관을 제시했다”며 “물질적인 요소에 정신적인 요소를 배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철저한 분리를 통해 물리학법칙으로 대표되는 근대과학의 세계관은 신을 기준으로 한 전통적 세계관과 공존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이렇듯 『성찰』은 시대의 특징과 한계를 잘 드러내주기 때문에 더욱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평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찰』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교수의 철학 고전에 대한 설명은 이 고민을 위한 시작점을 보여준다. 그는 “문학 고전 등이 그 자리에 가본 듯한 ‘공감’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다면, 철학 고전은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설득’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즉 철학 고전의 ‘설득’은 진위를 가리는 것에 가까운 것이기에 그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스스로 따져보는 것도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다.

이런 태도로 『성찰』을 읽었을 때 의심 불가능하다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의 주인인 ‘주체’가 존재하며, 또 그 ‘주체’가 곧 ‘나’라고 천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고 설명하며 “실제로 영국의 철학자 흄도 사고만 일어나고 있고 주체는 없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또 “그러나 ‘주체’ 없는 ‘사고’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인지, 그 ‘주체’를 ‘나’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논란의 여지가 많다”며 섣부른 비판으로 끝나는 것을 경계했다.

이런 태도를 주지한다고 해도 철학 서적인 『성찰』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지적 도전일 것이다. 이 교수는 “한 분야의 대가를 (책을 통해) 직접 만나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며 “여행을 갔을 때 입맛에 안 맞고 찾아가기 힘들어도 현지식당에서 만든 현지음식을 먹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럼에도 이를 읽는 것이 힘에 겨울 독자들에게 그는 “2차 문헌의 도움을 받아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강좌를 듣는 것이다”고 조언했다. 그는 “다행히 한국에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백화점이나 구청 등 일반인이 철학 강좌를 접할 기회가 많다”며 학생들에게는 대학 강의를 추천했다.

이런 노력을 들여 『성찰』을 이해하려는 독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교수는 “현재 한반도에는 세계에 유례없이 동서고금이 혼재하고 있다”며 “가치관과 세계관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지금은 『성찰』이 출간됐던 시기와 비슷하다”고 평했다. 이어 그는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세계를,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노력하는 『성찰』의 내용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서양 근대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해결점은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이 교수는 “철학은 정신의 체육관”이라며 “각기 다른 세계관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황을 생각해봐야 하는데 『성찰』의 독서가 이런 정신훈련을 가능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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