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리적 폭력 비판
주디스 버틀러 저
양효실 역ㅣ인간사랑
251쪽ㅣ1만 7천 원

당신은 건강하고 사랑받고 칭찬받는 데 익숙하며,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뛰어나다. 당신은 그래서 친구도 많고 가족과도 화목하고 주변에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신은 듣고 싶은 강의를 듣고 페이스북에 찍어서 올릴 만한 요리를 찾아다니고 방학에 가볼 만한 여행지를 정했고 졸업을 하면 어느 직장에 들어갈지 이미 정해두었다. 당신은 1년 혹은 10년 뒤의 모습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다. 당신은 착하고 예쁜 사람이 나오는 행복한 영화를 보거나 달달한 음악을 듣거나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삶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당신은 긍정적인 사람이고 당신의 얼굴에서는 빛이 난다.

당신은 상처가 많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고, 사실 친구도 내가 그 이야기를 하면 들어줄 것 같지 않고 용기를 내서 학교 심리상담센터에 다니고 있다. 가족은 화목해 보이지만 사실 그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라고들 하는데 내가 원하는 게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희생하는 부모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은 나를 잘 모른다. 행여 누가 내 상태를 알아차릴까 봐 아침에도 거울을 보며 웃는 법, 감추는 법을 연습한다. 나의 애인은 남들이 보기에는 애인이지만 사실 그/그녀를 내가 정말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그녀는 남들이 보기에 근사하다. 나는 버림받는 것, 혼자인 것이 두렵고 그렇기에 함께 다닐 뿐 그들은 나를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들은 놀라서 뒷걸음질 칠지도 모른다. 행복한 사람은 나는 아닌 것 같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더 고통받는 영화를 보는 날 어둔 극장 안에서 홀로 울었다. 세상 모든 슬픔, 불안, 불행은 다 나 혼자만의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약해지는 나를 어쩌지 못할 때가 많다. 나의 웃음은 사실 내 어두운 얼굴 위에 내가 씌운 가면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너무 무겁고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 모른다. 나는 행복한 척, 이해하는 척, 사랑하는 ‘척’하는 데 도가 텄다. 나는 내 얼굴, 내 가면이 늘, 가끔, 대체로 싫다. 벗고 싶다.

위의 두 타입은 뚜렷이 구분되는 다른 사람일 수도 겹쳐지는 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마 한 사람 안의 모순되는 두 모습이라고 말하는 게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사회는 전자의 타입을 좋아하고 사회는 전자의 타입에 걸맞은 사람들의 행동 규칙이나 매뉴얼을 가급적 많이 갖고 있다. 그들은 사회의 파이를 키우는 데 적합하다. 후자의 타입은 경쟁의 대열에서 뒤처지거나 경쟁에 가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사회가 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그래야 행복하기에 우리는 설사 우리 안에 후자의 모습이 있어도 그것을 억압하고, 숨기려고 한다. 지금 행복한 사람은 더 행복하거나 계속 행복하고 싶어 하고 지금 불행한 사람은 앞으로 행복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의 어둡고 아프고 약한 모습을 외면하거나 감추려고 한다.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는 중에 우리는 자기를 얼마나 억압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생기는 심리적인 상처나 고통은 과연 나을 수 있을까? ‘좋은’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되면 그때 우리는 행복해져 있을까? 과연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잘 아는 듯한 이 많은 대화가, 관계들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나는 이 연기, 이 가면을 벗고 고독하게 용기 있게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는 약한 나와 함께 살아가느라 분열되어 있다.

버틀러의 윤리는 규범적인 전통 윤리와 많이 다르다. 그녀의 윤리는 자기를 잘 알고 자기의 행위를 책임지는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다루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 혹은 공동체를 구한 영웅들, 강하고 확신에 찬 빛나는 이마를 가진 리더들을 위한 윤리가 아니다. 그녀의 윤리는 일관된 행위나 의지를 관철할 수 없는 사람들, 늘 자신이 세운 계획이 중간에 좌절되거나 자기도 모르는 자기, 욕망, 관계로 인해 실패하는 이들을 윤리적 주체라고 부르려는 이상한 윤리이다. 그것은 타자의 윤리이고 슬픔에 빠진 이들, 상처 입은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윤리이다. 사회가 패배자, ‘쓰레기’, 낙오자, ‘노숙자’라고 부르는 이들을 버틀러는 자신의 윤리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에게서 희망을 읽는 기이한 안간힘을 책 한 권으로 완수했다. 그녀의 책은 난해한 인문서이고 아름다운 시이고 사랑의 노래이다.

비판적 지식인인 버틀러의 문장은 어렵다. 그녀는 쉽게 이해되는 것들에 도사린 함정을 경계한다. 사는 게 어렵고 고통스럽고 아픈 것처럼 그녀의 문장도 어렵고 고통스럽고 아프다. 그러므로 모두를 위한 책이 아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새로운 말하기의 방식, 아니 이미 약자들이 사용하고 있던 말하기를 배우자고, 인정하자고 설득하려 한다. 강하고 밝고 분명한 말하기가 인간을 억압하는 말하기였으니 더듬거리다가 움츠러들다가 심지어 말을 잃는 말이 인간의 말이라고, 그런 말하기가 성공과 행복에의 갈망이 전쟁과 폭력을 묵인하는 이 끔찍한 세상에서 아직 남은 인간들의 말이라고 설득한다. 이러한 자신의 윤리를 위해 버틀러는 아도르노, 니체, 레비나스, 라플랑슈, 푸코와 같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론가들을 불러들인다. 폭력이란 단어가 물리적인 싸움, 전쟁,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대화, 말하기, 소통 중에 일어나고 그렇기에 어떤 말은 인간을 억압하고 살해한다는 주장은 가족, 친구, 애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중에 밥상머리에서 커피숍에서 거리에서 교실에서 벚꽃이 피는 4월에 이미 거의 죽어버렸던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될 것이다. 사회를 살리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말이 다시 인간을 살릴 가능성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강자들이 건강한 사회의 파이를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인간의 약함과 고통을 이야기한다. 버틀러는 강자들을 위한 말이 아닌 약자들의 말을 인간의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말은 살이고 살은 따듯하고 따듯한 것들은 모여 살고 모여 살기는 어렵고 어려운 것은 폭력으로 가거나 사랑으로 간다.

폭력은 나와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폭력은 너와 당신이 죽어갈 때 나와 우리 역시 죽이는 언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차이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오롯이 당신의 ‘결단’이다.

 

양효실 강사(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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