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스의 기호학
찰스 S. 퍼스 저

남들보다 미성숙해서였는지, 인문학도의 본분에 충실했던 탓인지, 아니면 1980년대 말의 어수선한 정국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 대학시절을 사로잡고 있던 의문 덩어리의 한가운데엔 “나는 누구일까?”가 놓여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해 내 질문은 “나는 무엇일까?”라는 존재론적인 것이었다. 나는 유인원과 가장 유사한 포유류나 창조주의 피조물 둘 중 하나에 속한다는 게 내 앞에 주어진 선택지였다. 유인원의 진화 모델과 신의 창조물 중 어떤 대답을 취하든지 간에 사람들은 자아를 타자와 구별된 독립적 개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한국의 철수는 자신이 영희나 미국의 마이클과 다를 뿐만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스스로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진실의 전모일까?

미국 프래그머티즘 사상의 창시자이자 현대 기호학의 정초자인 찰스 S. 퍼스(1839~1914)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연속체 안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자아를 확인하는 순간은 오로지 나의 무지를 깨닫거나 오류를 저질렀을 때뿐이다. 퍼스는 이렇게 말한다. “무지와 실수는 순수 통각, 즉 절대적 에고로부터 우리의 사적인 자아를 구별시켜준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적인 자아는 확고한 에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퍼스는 아직 자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아이의 행동을 통해 설명한다.

유아는 통상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이미 사고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자신에게 세계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는 몸을 우주의 중심처럼 느낀다. 어느덧 말을 배우고 대화를 시작한 아이는 타인의 언어가 사실에 대한 강력한 증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아이는 “난로가 뜨거우니 만지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난로의 뜨거움을 체험한 적이 없는 아이는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난로를 만짐으로써 “난로는 뜨겁다”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 순간 유아는 자신이 무지하여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게 되고, 타인의 증언 즉 엄마의 말에서 자의식의 징조를 발견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타인의 말이 옳고 자신의 생각이 그르다는 것을 오류를 저지름으로써 깨닫게 될 때에야 비로소 개인적 자아와 마주하게 되며, 우리의 사적인 자아는 오류의 순간이 아닌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무수한 타자들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은 채 공동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퍼스는 인간을 하나의 기호라고 본다. 이는 그가 인간을 인간의 언어와 동일시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기호론을 주장하기 이전에 퍼스는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생각이 기호라는 사고기호론을 펼친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의 생각은 단속적이기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문 연속선상에서 하나의 흐름(stream)으로 펼쳐진다. 퍼스는 모든 생각이 앞선 생각의 해석인 동시에 이후에 따라오는 생각의 기호(sign)라고 본다. 연속적인 해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사고는 끊임없는 기호생산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사고과정과 인간을 동일시한 퍼스는 인간이 단어보다 더 복잡할 뿐 단어와 다르지 않은 기호라고 간주한다. 각각 고유한 기호로 존재하는 인간들의 공동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흐름이고 연속체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인을 (정확하게는 타인의 언어를) 해석하고 또 타인에 의해 해석되며, 이런 과정은 무한하게 지속되기 때문이다.

최근 널리 유행하고 있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퍼스의 공동체적 자아 개념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서 공유되는 콘텐츠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에서부터 아카데믹한 고급 정보까지 매우 다양하다. SNS에서는 각양각색의 콘텐츠가 단순히 한 개인으로부터 다른 한 개인에게 전달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대중과 공유되고 더 나아가 서비스 플랫폼을 통한 견해의 수렴 또는 여론 형성에 이르기까지 한다. SNS의 사용자들은 매우 능동적이고 활발하게 인터랙션을 한다. 인터랙션은 자발적으로 사용자들이 자신의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횡적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에게 적극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 디자인을 요구하는 종적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프래그머티즘 사상은 퍼스가 속해있던 케임브리지의 ‘메타피지컬 클럽’에서 탄생했다. 하버드대학 화학과를 최우등으로(summa cum laude) 졸업한 퍼스는 어려서부터 모두가 알아주던 천재였다. ‘메타피지컬 클럽’에서 그는 올리버 웬들 홈스, 윌리엄 제임스, 천시 라이트 등 오늘날 프래그머티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동료들과 함께 다윈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철학사상을 주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스가 제임스나 제임스의 제자 존 듀이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괴팍한 성격과 동료들과의 불화, 그리고 난잡한 사생활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함에 따라 방대한 양의 원고를 생전에 제대로 출판하지 못한 까닭이 크다. 퍼스는 비록 19세기 미국 학계에선 성공하지 못했지만 수학과 논리학의 몇몇 선구자들이 일찍부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왔고, 특히 20세기 후반부터는 칼 오토 아펠, 위르겐 하버마스,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한 여러 석학들이 그의 프래그머티즘과 기호학 이론을 수용하여 현대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퍼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퍼스의 기호학』은 제임스 홉스가 퍼스의 철학 논문들 중 기호이론에 관한 것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앞에서 짧게 언급했던 부분에서 엿볼 수 있듯이 퍼스의 기호학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기호론이 언어학에 기반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퍼스의 기호이론은 그의 프래그머티즘과 외연이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2014년은 퍼스가 사망한지 백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국제퍼스학회와 퍼스재단에서는 7월에 미국 매사츄세츠대학교에서 대규모 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고, 한국기호학회에서도 올가을 학술대회를 퍼스 기호사상에 대해 21세기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내용으로 준비하고 있다. 한편 독일 무통출판사(Mouton de Gruyter)에서는 전 세계 퍼스 연구자의 논문들을 모아 『퍼스 인용집(The Peirce Quote Book)』을 연내에 출간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로 시작하여 퍼스의 기호학을 전공하게 된 나의 입장에서는 수학, 철학, 개별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풍성한 자원을 남기고 간 퍼스의 사상이 올해를 기점으로 더 풍부하고 견실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강미정 연구원(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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