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창 교수
(지리학과)

‘중국의 붉은 별’로 명성을 떨친 에드거 스노(E. Snow)의 부인이었던 님 웨일즈(N. Wales)가 쓴『아리랑』을 학생 때 읽은 적이 있다. 중일전쟁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36년 이들 미국인 기자 부부는 어렵사리 중국 혁명의 성지인 연안(延安)에 들어갔다. 남편은 모택동을 만나 중국의 붉은 별을 쓰고, 님 웨일즈는 훗날 ‘가장 피비린내 나고 가장 험악한 시대의 한가운데 뛰어든 민감한 지식인’이라고 표현한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김산을 인터뷰한다.『아리랑』은 33세에 일본 간첩 혐의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총살당한 사회주의 독립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았던 반제국주의와 항일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학생시절 전율에 가까운 흥분과 김산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그의 강인하고도 맑은 영혼을 느끼며 한달음에 읽었다. 그사이 벌써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리랑』에서 김산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모든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단 하나, 나 자신에 대해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그러나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족하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책을 떠올리는 것은 김산이 참혹한 시절의 와중에서도 『정치경제지리』를 쓴 것에 대한 지리학자로서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인간 존재에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들이 심히 훼손됨에도 ‘마음의 격동’을 일으키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를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고 살만해졌고, 민주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의 언저리에 있는 이만하면 됐다는 헐렁해진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세월의 볼모로 덜미 잡힌 채 각박하고 빠듯한 일상의 흐름을 엎을 엄두를 낼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자유, 정의, 민주, 평등, 인권, 노동은 늘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이라고 말하지만 정작에는 구시대 개념으로 치부하고, 대학에서조차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 사회에서는 일자리를 포함해 다방면에 걸쳐 이러저러한 권리들이 은연중에 정치경제적으로 세습되고 있고, 논두렁 정기만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사회로 흘러가고 있다. 성찰 없는 빠름과 성급함은 망각사회를 부채질하고, 어제의 부조리와 부정의조차도 쉽게 잊게 만든다. 때문에 부조리와 부정의, 역사의 퇴행이 횡행해도 그러려니 한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퇴행들에 대해 너무나도 무성의하거나 무감각하다. 정치는 지향점을 개척하기보다는 남의 실수나 얻어 타려는 단세포 사고와 말의 희롱만이 있을 뿐이다. 지식생산 조차도 고유의 자료를 스스로 조사하여 모으고, 오랜 기간에 걸쳐 주제를 천착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논문의 개수나 늘릴 것인가에만 몰두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든 흐름들은 스스로의 끈기 있는 굳센 노력들과 깊은 생각들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조롱하는 행태를 부채질한다. 나만이라도 세습이 될 수 있는 초이동의 웜홀(worm hole) 출세 튜브로 진입하고자 다툼하는 튜브화 사회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 밥상 차릴 생각은 안 하고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거나 이왕 벌어진 일에 편승하여 결실을 편취하려는 일에 절어 있다. 코피 흘린 김에 혈서나 써 볼까 하는 심보다. 이러한 묻어가려는 심보로는 시냇가의 물들이 모여 만들 바다의 거대한 파도를 읽을 수가 없다. 나도 그저 욕먹지 않을 정도의 묻어가려는 심산이 오래전에 마음을 독차지해버린 것은 아닌지? 나는 다시 주체적으로 마음의 격동을 일으킬 수 있을까?

1983년 중국공산당은 김산의 처형에 대해 특정한 역사 시기에 발생한 억울한 사건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를 복권시켰다. 한국 정부는 2005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산이 말한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적어도 코피 흘린 김에 혈서를 쓰는 행실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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