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에서 그림 숙제를 받아오면 그 작은 손으로 8절 도화지를 빽빽하게 색칠해내느라 낑낑대곤 했다. 어린 마음으로는 그림에 하얀 부분이 남는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인지 비는 부분이 있다 싶으면 어떻게든 다른 색의 크레파스를 찾아 메워 넣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강박관념은 불쌍한 한 어린이로 하여금 그림의 주제나 완성도를 스스로 파괴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어린이는 나쁜 의미로 ‘키치’한 그림을 제출하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근래 『대학신문』의 기획기사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혹시『대학신문』도 이런 강박에 사로잡혀 지면의 완성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면을 빽빽하게 채우고는 있지만 정작 그 존재감은 사라져버린 삽화 때문이다. 1873호 기획기사 ‘나는 57점짜리 연구자입니다’, 1871호 기획기사 ‘자본주의의 환영을 깨고 경제를 되찾다’를 보면 이와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해당 기사들에서 삽화의 역할은 단지 지면의 빈 부분을 채워넣는 것에 그치고 있다. ‘이라이프’가 어떻게 기존 인용지수 평가 문제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폴라니의 ‘사회’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어떻게 비교되는지 시각화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삽화는 기사 내용을 원활하게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기사의 가독성을 높이기라도 해야겠지만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글자를 보고 순간 아찔해진 정신을 보면 이조차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물론 삽화가 기사의 전반적인 주제로부터 벗어난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자체의 완성도가 낮은 것도 아니지만 더 나은 모습으로 인쇄될 수 있었던 지면을 그려보면 아쉬움이 짙게 남는 것은 사실이다.

1872호 기획기사 ‘예술가들에게도 봄은 오는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다른 호에 비해 삽화가 본연의 임무를 완수해내고자 한 노력이 엿보이지만 부족한 점은 여전히 곳곳에 산재해있었다. 가령, 3년 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포스터나 ‘크라우드 펀딩’이 이루어지고 있는 특정 웹사이트의 메인 화면은 한 면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비중만큼의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대신 ‘크라우드 펀딩’의 구조나 실제 사례들을 분석해서 이미지화하는 편이 보다 나은 편집 방향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진지한 고민들이 해당 지면에서는 결여됐다.

유념해야 할 것은 지면에 실리는 모든 것들은 기사라는 점이다. 이는 지면 하나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이해시킬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야 하며 어떤 작은 부분이라도 무의미하게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취재기자와 삽화기자 모두 삽화의 중요성에 대해 자각하고 실제 구성에 대해 능동적으로 상의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제 그만 삽화를 ‘배경화’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자. 삽화도 기사다.

전명준
자유전공학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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