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프랑스 혁명을 이끌던 로비에스피에르는 “반혁명파를 숙청하겠다”는 연설을 한다. 다음날, 쿠데타가 일어난다. ‘테르미도르 반동’의 시작이었다. 쿠데타가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누가 반혁명파인지 밝히지 않았던 연설의 모호함이 큰 몫을 했다. 반혁명파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이 힙을 합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모두를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최악의 정치라면, 모두를 아군으로 만드는 것은 최선의 정치가 아닐까. 취임 1년을 갓 지난 대통령은 벌써 숱한 유행어를 남기고 있다. 대통령이 제시하는 화두마다 곧 사회적 의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적 강자의 횡포가 심해지는 현실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분노하면서, 경색되어가는 남북관계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많은 이들이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고 느끼면서, “경제 민주화”, “통일은 대박”, “비정상의 정상화”와 같은 의제는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불만과 고민에 대해 정부가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 안도를 느낀다. 나아가 의제가 누구나 해당될 만큼 포괄적이며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만큼 당위적이기에, 분열된 한국 사회를 통합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가지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비정상은 당연히 정상화해야 한다. 불필요한 규제는 당연히 없애야 한다. 그런데 무엇이 비정상인지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현 정부의 국정 운영에서 그 부분에 대한 논의는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창조 경제”인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무엇이 창조적인지는 대통령이 정할 것이다.

▲ 삽화: 이예슬 기자 yiyeseul@snu.kr

대통령의 화두가 포괄적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목표는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다. 그렇다면, 목표에 내재한 갈등은 은폐된 채 모두에게 좋은 것으로 선전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역량을 믿고 따르면 될 뿐, 목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필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온 사회가 힘을 합쳐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제 민주화”에서 “규제 개혁”으로 국정 운영의 목표가 전환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경제 민주화”는 경제적 강자의 힘을 제한하는 것이고 “규제 개혁”은 그 힘의 제한을 풀어주는 것이기에 상반된다는 지적은 누군가의 오해일 뿐이다. 그렇게, 포괄성은 권력의 자의적 작동의 범위를 넓혀준다.

논의는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비정상을 그대로 두려는, 통일에 반대하는, 불필요한 규제를 유지하려는 행위이다. 누구나 따라야 하는 당연한 것에 대해 딴지를 거는 사람은 전체 사회의 적일 뿐이다. 결국 당위성을 전제한 정치는 나에 맞서는 적을 쳐부수려는 성전으로 귀결되고 만다. 자신에게 반대되는 존재를 “해충”이나 “원수”로 비유하는 대통령의 화법은 그러한 관점에서 자연스러운 언사일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심각한 무능을 보여주었다. 실망한 많은 이들은 정치인이 아니라 기업인에게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국가와 기업의 작동 방식이 달랐던 만큼, 기업인 대통령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정치와 경영이 모두 실패를 거둔 이후, 많은 사람들은 통치에 희망을 거는 듯하다. 하지만, 통치는 이미 225년 전 프랑스에서 그리고 35년 전 한국에서 절대자의 죽음과 함께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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