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튜어트 홀 저
임영호 역ㅣ헌나래
544쪽ㅣ2만 8천원

“현실과 개념, 현실과 이론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방법밖에 없다.”

“특정 사회적 맥락에서 도출된 개념을 다른 사회에 적용할 때 양자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1984년 5월 당시 필자는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주제는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나타난 사회·문화적 현상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 답하는 사회과학 방법론과 관련된 것이었다. 마침 한 학기 홀 교수가 석학 강좌를 하고 있어서 수업을 들으면서 개인 면담을 신청했었던 때 일이다.

예를 들어 인권의 개념은 보편적일 수 있는가, 획일적으로 서구의 인권개념을 다른 사회적 맥락에 적용할 때 현실인식에 왜곡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등의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홀 교수의 답은 참 애매하게 들렸다. 현실과 개념 사이를 어떻게 왔다 갔다 하라는 말인가. 두 번째 면담에서 잘 이해가 안 된다, 다시 설명해 주면 좋겠다고 조금은 따지듯 물었더니, 답은 이랬다. 구체와 추상의 관계에서 맑스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고 했을 때 왜 ‘하강’이 아니라 ‘상승’이라고 했는가를 생각해 봐라”, “왔다 갔다 한다는 건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3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현실과 이론 사이의 간극을 나는 잘 메꾸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그저 나름 정리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이렇다. “내 앞에 놓인 현실, 내가 살고 있고 탐구하고자 하는 현실을 잘 들여다보면서, 거기로부터 나타나는(떠오르는) 느낌과 감정, 인식을 개념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현실 안에서 몸으로 먼저 경험하면서 문제를 만들고, 탐구의 대상을 정하는 게 맞을 텐데, 여전히 책에서 읽은 개념을 먼저 떠올리고 그걸 현실에 대입하려는 쉬운 방법을 택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난 2월 홀의 부음을 듣고, 그와의 면담, 카리스마 넘치는 강의와 강연,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는 내 모습이 겹쳐졌다.

스튜어트 홀이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란 저서에서 제기한 핵심질문은 “왜 영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에 해를 주는 정책을 펴는 대처를 선거에서 지지하는가”였다. 그리고 거기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전략과 인식에 매몰되어 있는 영국 노동당과 좌파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필자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홀의 답이 타당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대처리즘이 어떻게 일반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는가를 분석한 그의 방법론 혹은 방법론적 전략이다.

내가 홀을 읽으면서 크게 깨닫게 된 홀의 방법론적 전략은 ‘현실을 들여다보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떻게 1970년대, 80년대를 통해 영국사회가 불평등이 확대되고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는데도 불구하고 우측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쇼(The Great Moving Right Show)가 가능했는가를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대처리즘의 문화정치』였다. 우선 대처리즘이 신자유주의(neo-Liberal)와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를 기가 막히게 잘 결합하고 있음을 분석했다. 간략히 정리하면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시장을 통한 자동조절을 지지하고, 사회적 불평등은 당연하며, 복지국가가 과다확장됐다는 믿음과 실천의 체계라면, 신보수주의는 국가에 대한 지지, 법과 질서, 전통적 도덕과 가족, 민족문화 등을 지지하는 이념이라 할 수 있다.

두 이념의 결합을 이념의 수준에서 분석한 게 아니라, 그는 이들 가치와 믿음, 이념들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는가에 주목했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보통의 남자와 여자(수입도 시원치 않은)들이 쇼핑, 머리 스타일, 게임, 패션,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 등 하찮은 행위들에 ‘목숨 거는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가를 느끼고 알게 된다 - 여기가 영국문화연구(British Cultural Studies)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대처리즘이 어떻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불안과 두려움에 호소했는지를 밝힌다. 노동당의 케인즈주의적 수요창출정책과 복지국가 정책이 실업률, 상대적 빈곤 감소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병원에 줄 서는 환자들은 줄기는커녕 점점 더 많아지고 있지 않느냐, 교육을 통해 기회균등이 확대되지 않지 않았는가, 노조는 너무 많은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가, 많은 노동자들이 범죄 위험에 노출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등등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처리즘은 노동당의 실패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 위에 가족의 귀중함, 법과 질서 그리고 강한 국가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홀은 이렇게 대중의 자발적 동의, 적대세력에 대한 비판과 공격, 개인에 대한 약속의 결합을 ‘권위주의적 대중주의(authoritarian populism)’라고 개념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와 대중의 저항은 사회혼란과 무질서의 상징이 되고, 복지국가는 무위도식하는 하위노동자의 천국이 되었던 것이다.

이론을 앞세우지 않고, 기존의 관점을 뒤집으면서 현실을 들여다보는 홀의 능력은 역시 개인의 삶과 삶의 조건에 대해 정면으로 대면하는 자세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을까. 자메이카에서 자란 흑인 학생이 1951년 로드장학생으로 옥스퍼드 영문과에 입학한다. 대학에서 건널 수 없는 인종주의를 경험한 그는 박사논문 쓰기를 포기하고 2년간 빈곤한 강사생활을 거쳐 「뉴레프트 리뷰」지 편집장이 된다. 당시 뉴레프트에는 홉스봄, 윌리암즈, 톰슨 등 빛나는 영국의 지식인들이 합류해 있었다. 가끔씩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인종주의를 외면하고, 무난히 박사논문을 제출했더라면 어디에선가 영문학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홀은 편안한 길을 버리고 나는 영국인이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아무나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이런 용기와 열정 위에서 그는 불평등을 감수하는 대중들이 마음과 그 위에 작동하는 억압적 제도의 결합을 읽고자 했다. 그에게 현실과 현실의 분석은 늘 앞서고, 이론과 개념은 뒤따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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