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태 교수(철학과)가 학부 시절 읽은 초횡의 '장자익'. 장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장자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사진: 이혜빈 기자 beliveyourse@snu.kr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는 장자 사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친숙하다. 또 장자 사상은 현실을 떠나 초월적 세계에서 유유자적하는 신선의 이미지로도 익숙하다. 그러나 『장자』의 저자로 알려져있는 장주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실적인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견고한 가치관들이 실상 불확실한 것임을 탐구함으로써 현실 속 제약들에서 벗어나려 했다.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하는 것은 현실적 삶을 극복한 결과로서의 초월인 것이었다. 『장자』가 이천 년 넘도록 고전의 지위를 지켜온 것도 그 논의가 항상 현실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신문』은 장자 연구자인 장원태 교수(철학과)를 만나 『장자』에 담긴 문제의식과 그 함의를 구체적으로 들어봤다.

먼저 장 교수가 생각하는 ‘고전’은 무엇일까. 그는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고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부딪힌 문제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며 “고전은 여러 세대가 비슷하게 공유한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인 『길가메쉬 서사시』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이 책은 전설적 영웅 길가메쉬가 친구의 죽음을 겪고 난 후 죽지 않는 비법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불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오랜 숙고 과정을 파고드는 원형적 질문이다. 장 교수는 “결국 불사에 다다르지 못한 길가메쉬처럼 고전은 스스로 제기한 질문에 무조건 답을 내주진 않는다”며 “그러나 주인공의 여행 과정처럼 고전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끝나지 않는 지적 탐색과 모험 과정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질문을 던져 고전으로 자리매김 됐을까.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들이 어떻게 성립된 것인가?’이다. 이 질문은 우리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의 주체가 되는 나 자신마저도 ‘인위적’으로 성립됐다고 전제한다. 장주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일종의 합의가 이뤄진 가치관의 토대를 끊임없이 회의하고자 한 것이다. 장 교수는 “장주의 질문은 당시 사상가들이 대안적 사회체제이론을 모색한 것과 비교하면 상이한 성격의 사고였다”며 “유가에서 덕치를 주장하면 그 ‘덕’이 어떤 근거에서 성립된 것인지 의심하는 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장주는 덕 외에도 유가가 사회 통치의 근본으로 삼으려는 예(禮)와 의(義) 등의 가치관을 의심하고 비판했다. 장주가 문제 삼는 지점은 덕이나 예의 개념의 기반이 되는 ‘선과 악’의 구별 기준이 과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의 여부다. 그에 따르면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존재하지 않기에 불확실한 선악 개념을 토대로 한 규범에 집착하는 것은 차별과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장주가 『장자』의 첫 부분인 ‘소요유’의 여러 예시들을 통해 절대적인 구별은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도 그런 불확실한 구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장자 사상 이해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소요유’ 편에 나오는 매미와 작은 새는 길이가 몇천 리나 되는 붕을 보면서 “우리는 펄쩍 날아 느릅나무 가지에 올라가 머문다. 무엇 때문에 9만 리나 높이 올라 남극까지 가는가?”라며 인위적인 크고 작음의 개념을 비웃는다.

한편 장주가 유가의 덕목들을 문제 삼는 또 다른 지점은 유가의 성인들이 여전히 명성을 갈구하는 등 ‘자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장주의 계속되는 회의는 ‘나 자신’이라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근거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며 거기서 그는 자아의 불확실성을 발견한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됐는데 깨어보니 나비가 장주의 꿈을 꿨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호접몽 이야기가 그런 사고를 보여준다. 장 교수는 “흔히 알려진 호접몽 이야기는 장주의 끊임없는 회의적 사고를 보여주는 것이다”며 “내가 확실하다 생각하고 있는 자아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나를 구성한다고 생각되던 요소들의 불확실성을 체감하는 순간 자아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자아’라는 개념 또한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장주의 ‘무아(無我)’ 상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가치관들을 거부하고 차별과 아집에서 벗어난 인간형이다. 그런데 얼핏 체계를 이루는 모든 안정적인 규범들을 상대화시키고 거부하는 모습 때문에 『장자』는 급진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란 비판까지 받는다. 이에 대해 장 교수는 “장주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라 회의주의자이다”며 “회의주의자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자는 상대주의라는 또 다른 ‘주의’ 자체를 다시 회의하고 그 근본을 되짚는다”고 말했다. 어떤 내용이든 규범화되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사상이 있으면 장주는 그것의 근거를 파고들고 확실성을 문제 삼는다. 이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사람의 자아 자체가 확실한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노자의 무위자연 개념조차 그것이 무위자연을 ‘하자’는 주장이 된다면 장주는 그것을 회의하기 시작한다”고 말하며 흔히 ‘노장사상’으로 엮이는 노자와의 차별점도 장주의 독특한 회의주의 문제의식으로 설명했다.

회의적 사유를 거듭하는 『장자』에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삶의 길’을 직접 찾기는 어려워 보일 수 있다. 장 교수는 “실제로 장주는 자신의 사상이 당시 대안적 사회체제이론을 탐구하던 사상들과 달리 현실적으로 무용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주 역시 현실적 조건들을 인식했으며 그에 바탕을 둔 사상을 펼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이다. 현실 속의 인간은 운명적으로 국적이나 가족 관계 등을 갖게 되고 그의 가치관은 그런 요소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때문에 그가 ‘진실’이라 믿는 것은 앞서 설명한 장자의 회의적 사고에 따르면 상당히 인위적인 것이고 차별과 아집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장주는 만약 진실이라 믿는 일이 있다면 과감히 그 일을 해내고 그 결과를 운명으로서 수용하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장자』에선 외교관에게 그 임금을 충실히 섬기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세계와 자신을 의심하라는 앞선 명제와 대조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운명에 순응하라는 논리를 면밀히 살펴보면 굳이 차별을 둬 행복과 불운을 판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는 현실적 가치관에 대한 계속적인 회의에서 얻어진 초탈한 마음가짐이다.

마지막으로 장 교수는 『장자』를 ‘읽는 법’에 대해 조언했다. 먼저 『장자』는 장주 혼자 다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나 그와 비슷한 유파들에 의해 같이 집필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장 교수는 “일반적으로 『장자』는 장주 외에 무군파, 황로파, 술장파라는 학파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파악되며 따라서 네 개의 목소리가 담긴 셈이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장자』의 앞뒤 내용에 모순이 있고 책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래서 장 교수는 장주 자신이 집필한 『장자』 ‘내편’을 중심으로 읽으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이해하기가 어려워도 일단 참으며 읽고 무엇보다 읽는 이 스스로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창조적 독해를 하길 권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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