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근우
대중문화 평론가

 “날 치워봐라.” 웹툰 「송곳」 1부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이수인은 씹어 뱉듯 독백했다. 중간 관리자로서 매장의 판매직들을 어떻게든 쫓아내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했던 그는 직장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점장으로부터 사회적 죽음에 가까운 선고를 받는다. 예민한 윤리 의식 때문에 혼란과 불안감에 허덕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우유부단하게 굴 수밖에 없던 남자는, 그 순간 눌러왔던 감정을 토해내며 말한다. 날 치워보라고, 제 발로 알아서 치워져 줄 마음은 없다고. 그 날 선 독백이 독자의 가슴에도 시퍼런 날을 겨눈다면, 단지 대사와 작가의 연출이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수인이 처한 딜레마와 그 딜레마의 근본 문제인 노동자의 권리 침해라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습지생태보고서」와 「대한민국 원주민」, 「울기엔 좀 애매한」 등의 작품에서 날카로운 통찰력과 현실 인식을 보여주던 최규석 작가는 이처럼 웹툰 데뷔작 「송곳」에서 한국의 노동 문제로 시선을 돌린다. 6월 민주화 항쟁을 다룬 「100℃」 후기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월 항쟁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엘리트를 제외한 장삼이사들에게도 유의미할 정도로 삶의 질을 올려준 것인지 질문하던 그가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한 의제인 노동 문제에 천착하게 된 건 필연적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가장 낮은 곳에 임한 이야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송곳」에서 이수인이 다니는 외국계 유통회사 푸르미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재 한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수인의 회사는 어떤 합리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무조건 직원을 알아서 나가게 하라고 한다. 돌려 말할 뿐 직원의 인격을 모독하라는 뜻이다. 적법하고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해고 절차 따위는 여기에 없다. 반면 이에 대항해야 할 노동조합(노조)은 조합원 수도 적고 이제 첫 교섭을 하는 초짜 오합지졸이다. 하지만 이 답답한 상황조차 현실의 그것과 비교하면 딱히 더 나쁘다고 하기 어렵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국내 거대 유통회사인 이마트의 최병렬 전 대표는 노조에 대한 불법 사찰과 노조 설립 방해로 기소됐다. 최근에는 이마트가 서울고용노동청의 조사를 받을 당시 회사로부터 허위진술을 지시받았다는 퇴직 직원의 증언도 뒤따르고 있다. 아니 에두르지 말자. 당장 한국을 대표하는 1위 기업이라는 곳에서 노조 설립을 못하게 한다. 과연 이것이 「송곳」에서 이수인이 견뎌내야 하는 부조리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동법이라는 것이 있다. 아마도 곧 이수인과 조우할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주인공 노동상담소 구고신 소장처럼 이 분야에 정통한 운동가도 있다. 하지만 그 구고신조차 중국집에서 임금 체불을 당한 젊은이를 도와주기 위해 법이 아닌 중국집 주요 고객인 노조 조합원들을 통해 압박을 줘야 했다. 만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노동자의 권리라는 개념에 대해 무지한 경영자도 많다. 직원들이 여관에 모여 자신을 세무서에 찌르기로 작당했다며 교섭안에 ‘회사는 회사 근처에서 단체로 숙박하는 자를 징계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는 사장의 모습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은 그 노동법이라는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환경이다. 최근 벌어지는 사회적 운동 중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노란 봉투 프로젝트는 회사가 노동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손해배상소송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동참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아름답지만, 이 운동을 벌여야 하는 상황은 비극적이다. 노동조합법 제3조가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명시하지만, 현실에선 웬만한 파업에 대해 위법 파업이라는 굴레를 씌워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 및 가압류를 신청한다.

이처럼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한국 노동자의 현실을 돌아보며 과연 「송곳」의 최규석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그리고 이수인과 구고신이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 궁금한 동시에 걱정되는 건 그래서다. 그들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회사만이 아니다. 전작에서 그러했듯 최규석 작가는 사태를 명확한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파견업체 직원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원칙주의자 이수인을 보며 짜증 내는 직원들도 당장은 동지가 아닌 설득의 대상이고, 자신을 왕따시킨 동료 관리자들도 단순한 악이 아닌 어쨌든 투쟁에 동참시켜야 할 대상이다. 아마 근 몇 십 년 동안 노사 갈등이 있을 때마다 웬만하면 사측의 손을 들어주는 정부도 그들의 잠재적 투쟁 상대일 것이다. 과연 「송곳」이 모든 난관을 극복한 이수인의 승리로 끝날지, 아니면 더욱 비참한 꼴로 그가 치워지는 꼴을 볼지는 알 수 없다.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하는 만큼 안일하게 해피엔딩을 시도하지 않는 최규석 작가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여 지금 「송곳」을 읽는 것이 의미 있다면, 이토록 각박한 한국의 노동 환경에 대한 어떤 해답이나 힌트를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열심히 시사 잡지를 찾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도 마음 아파할 줄 아는 능력이 없으면 공감할 수 없는 이 사안들을 만화라고 하는 지구 상에서 가장 메시지 전달 효과가 높은 매체를 통해 재밌게(물론 하하호호 재밌다는 뜻은 아니다) 접하고 한 번쯤 곱씹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야말로 「송곳」의 현재적인 가치 아닐까. 이 작품이 결국 읽는 사람만 읽는 시사 잡지가 아닌, 불특정 다수에게 열려 있는 웹툰 플랫폼, 그것도 성인 취향의 작품이 많은 다음이 아닌 10대 독자가 많은 네이버에서 연재되는 건 그래서 더 긍정적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 작품이 네이버의 수많은 작품 중 낮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댓글들에 대해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10대 취향의 네이버에 와서 괜히 좋은 작품이 홀대받는다는 식의 반응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건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얼마 전 한 일간지는 「송곳」을 비롯한 몇몇 사회 반영적인 작품에 대해 ‘개념 웹툰’이라 정의하고 그 외의 작품들과는 선을 그었다. 개념이니 아니니 하는 그 정의부터 웃긴 것이지만, 그 정의가 그들이 말하는 ‘개념 웹툰’을 보는 독자들에게는 우월한 기분을 줄지언정, 정작 「송곳」을 읽으면 좋을 수많은 독자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작품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 내적으로 또한 외적으로 「송곳」에 대한 가장 온당하고 의미 있는 평가는 재밌다는 것이다.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이수인의 입을 빌려 나오는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은 여전히 날카롭고, 그런 그가 세상과 갈등하는 과정은 어떤 액션 만화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요컨대 딱딱한 공자님 말씀과는 거리가 먼, 만화의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는 작품이다. 그렇다, 길고 길게 우회했지만 결국 이 글은 결국 「송곳」을 읽어보자는 일종의 영업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작품이 그려내는 각박한 현실을 살아내는 이들에 대한 아주 작고 가장 손쉬운 연대일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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