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경량 강사
국사학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정’과 ‘도전’이라는 말이 횡행하더니 요 근래에는 ‘힐링’과 ‘멘토’가 유행이 되었다. TV에서는 이 시대의 스승이니, 선생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수사로 치장된 인문학이나 심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다 강연을 시키고, 서점가에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인생의 지침서가 되어 주겠노라 외치는 책들이 가판대를 뒤덮는다. 한때 열정과 도전이라는 말로 은폐되었던 현실의 고통과 좌절감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이제 사람들은 아픔을 잊기 위해 힐링을 갈구하고 자신을 구원하고 이끌어 줄 멘토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멘토를 자임하고 책이니 강연이니 하는 것들을 통해 명성을 얻은 이들을 보라. 그들 역시 무너지고 흔들리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얄팍하고 자기 위안적인 것들이다. 어쩌면 힐링을 해 주겠다는 그들이야말로 외려 힐링을 받고 있는 이들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연장에 가득 앉아 있는 ‘나보다 불행한’ 이들의 머릿수를 세어보며, 혹은 계좌의 늘어나는 숫자를 생각하며 본인이 성취한 사회적 성공을 되새김질하고 자기 삶의 고통을 지우는 진통제로 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필자는 연애 상담처럼 무용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상담을 해 주는 당신의 친구, 혹은 선배, 동료는 사실 당신만큼 당신의 연애를 알지 못하며, 또 관심도 없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철학자에게 아무리 진리를 물어 봤자 아는 바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TV 주식 채널에 등장하여 가치적 분석이니 기술적 분석이니 외치는 주식 전문가들, 사실은 그들도 주식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자신보다 많은 경험을 쌓은 이들이 축적한 지식과 성찰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초월자가 아니며, 인생이라는 답지 없는 시험을 치르고 있는 수험생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 처지이다. 그러니 혹 답지를 보기라도 한 양 구는 수험생이 있다면 환호하거나 추종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시하거나 경계할 일이다.

대학가에는 예전부터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학사는 자기가 배울 만큼 배웠고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고, 석사는 자신이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며, 박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도 다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라는 이야기다. 한낱 우스갯소리이지만 앎의 탐구와 지식의 축적이 기실 무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가는 과정임을 인정한다면 의외로 현기가 넘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인 이유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둘러싼 불가측성과 총체적 무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원천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성격의 문제이다. 강연 한 두 번, 책 한 두 권을 읽는 요령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지의 바다에서 길을 잃거나, 좌초하거나, 외로움을 느낄 때는 어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모 소설가의 말마따나 충고가 아니라 고백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옳겠다.

근거 없는 자의식과 허위적 명성을 재료로 만들어진 멘토들의 충고와 선언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에서 조심스럽게 건네지는 고백이야말로 진정 신뢰할 수 있는 인생의 길잡이이다. 개인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과 한계를 전제하고 타인의 삶에 대한 ‘알지 못함’을 인정하는 고백의 겸손함은 듣는 이에게 선택을 강요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고백을 주고받으며,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이해와 연대 의식이야말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불완전하지만 유일한 나침반인 셈이다. 무지와 불가측성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에 멘토는 없다. 작은 등잔불로 서로를 비춰 주며 어두운 인생의 바다를 함께 항해하는 동료들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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