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조급한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했다. 4시 35분, 영화가 시작된 지 30분이 넘은 시각이다. 한창 영화에 몰입하고 있을 다른 관객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상영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스크린 앞의 관객석엔 단 한 명의 관객도 없었다.
이날 내가 본 영화 「탐욕의 제국」은 삼성 반도체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과 유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기쁨도 잠시, 이들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간다. 그들은 화학물질의 악취가 풍기고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공장에서 기계처럼 일했다. 방제복 없이 일하다 손톱이 썩어 들어가도, 아이를 유산해도 보상을 받을 길은 없다. 1인 시위, 기자회견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지만, 삼성도 정부도 책임을 회피한다. 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난 왜 지금껏 모르고 있었을까. 마음이 먹먹해지는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왜, 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극장의 관객석은 텅 비어 버린 것일까.
「탐욕의 제국」보다 한 달 일찍 개봉한 「또 하나의 약속」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만화 「먼지 없는 방」과 「사람냄새」 등 삼성이 저지른 부정부패와 인권 유린에 관해 비판하려는 시도는 계속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자본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영화계에서 대기업 ‘삼성’을 비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두 작품은 제작단계부터 상영관을 확보하기까지 난항을 겪었고 ‘외압설’로 화제를 모았다.
영화 시장은 소수의 거대 자본이 제작에서 배급까지 모든 과정을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한 영화가 상영되지 못하도록 차단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있다. ‘탐욕의 제국’은 반도체 공장 장면을 촬영할 장소를 빌리기 위해 전국의 공장과 연구소에 요청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두 영화 모두 ‘삼성’을 다뤘다는 이유로 투자사들이 지원을 꺼려 개인 기부자들의 푼돈을 모아 겨우 빛을 볼 수 있었다.
어렵사리 개봉한 후에도 영화가 관객에게까지 닿기엔 장벽들이 건재했다. 롯데시네마, CGV, 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들은 한 자리 수의 상영관을 내주었고 이마저도 서울의 주요 상영관을 제외한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2년 서울 국제여성영화제에서 「탐욕의 제국」이 수상하자 삼성그룹은 영화제에 지원금을 끊었다. 과거엔 국가가 체제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는 예술을 직접 검열했다면, 이젠 그 권력이 ‘자본’으로 이양돼 더 교묘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자유로운 표현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소위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횡포에 의한 것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당신의 이웃이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으며, 당신이 사용하는 핸드폰의 회사는 불법을 자행하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피하려고 아예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 쪽을 선택한다. 어쩌면 이런 ‘불편한 목소리’를 내는 작품들을 압박하는 건 대기업도, 정부도 아닌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관객은 과연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갈수록 사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품들은 버려지고 오직 자본의 입맛에 맞춘 상품들만 살아남을 것이다. 문화의 다양성도, 표현의 자유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텅 빈 극장처럼.
「탐욕의 제국」엔 삼성 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으로 1급 장애인이 된 한혜경 씨가 등장한다. 그녀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입을 간신히 벌려 말한다. “지금 내 인생, 바보 같잖아. 노래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그러나 진짜 ‘바보’는 누구일까. 우리가 속한 사회의 불편한 진실에 무지한, 아니 진실을 회피하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귀 기울이기보단 내 갈 길 가기에 바쁜 사람들만 가득해진다면 그곳이야말로 이기적인 ‘바보’들의 사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