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석주 교수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

이스턴은 정치를 한 사회 내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하였다. 가치의 배분이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요, 정치적 결정이 권위적이라 함은 그것이 모두에게 관철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러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어떤 이의 견해나 이익이 다른 이의 견해나 이익에 비해 특별히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만인은 정치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명제는 그 부정에 비해 우리의 윤리적 직관에 더 부합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습 왕정이나 독재보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더 좋은 체제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상당 부분 정치적 평등이란 가치에 대한 공감에 있을 것이다.

올 2월에 타계한 정치학자 로버트 달 은 춘추 아흔이었던 2006년에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On Political Equality)』를 출간하였다. 정치 철학자 샤피로가 「포린 어페어지」에 기고한 달을 추모하는 글의 제목이 “민주인(Democracy Man)”이었을 정도로, 그는 평생을 민주주의 연구에 매진해 왔다. 민주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넘나들며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남긴 이 사상가가, 박사학위를 받은 지 일갑자가 훌쩍 넘은 후에, 그의 대표적 이론서인 『민주주의론 서설(A Preface to Democratic Theory)』이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난 후에, 인생 마지막 저술의 주제로 선택한 것이 평등이었다. 이는 평등이야말로 민주주의 이상의 근원이며 동시에 현실 민주정치의 얼굴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임을 시사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열 명으로 구성된 산악 동호회가 여름 정기 등산 장소를 설악산과 지리산 중에서 정한다고 하자. 일정한 기간의 토론을 거친 후, 일곱 명은 설악산에 가고 싶어 하고 세 명만이 지리산에 가길 원한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면 이 동호회는 마땅히 설악산을 가야 할 것이다. 이 정도의 정치적 평등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많은 나라에서 성취된 것일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열 명이 그 결정에 온전히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설악산에 가고 싶어한 회원 중 한 명은 상당한 재력가로 모임 때마다 식사와 뒤풀이 비용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 어떤 회원은 노동시간이 길어서 남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다. 어떤 회원은 대기업의 간부고 다른 몇몇 회원은 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협력업체의 직원이었을 수도 있다. 달이 말하는 정치적 평등은 일인 일표 다수결의 절차적 평등을 넘어서는 정치적 자원, 능력 등의 실질적 평등을 의미한다.

▲ 정치적 평등에관하여
로버트 달 저
김순영 역ㅣ후마니타스
155쪽ㅣ1만원

이 책의 핵심 질문은 이러한 실질적 정치적 평등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쟁취될 수 있는가이다. 이 주제를 가장 흥미롭게 논의한 부분은 마지막 두 장인데, 거기서 달은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평등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현재보다 더욱더 정치적 불평등이 확대되어 미국이 더 이상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정치적으로 불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시나리오다. 반대로 둘째는 아주 낙관적인데, 미국이 정치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 제도들을 채택함으로써, 미증유의 정치적 평등을 이룩한다는 시나리오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달이 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이유다. 그는 이 두 가지가 다른 수많은 가능성보다 특별히 더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더 현실이 될 여지가 많은지를 토론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두 경우를 이야기한 동기는 우선 현시대인들의 실천에 따라 가능한 미래의 범위가 넓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즉, 그는 실천이 배제된 예측으로서의 정치학이 아닌 각기 다른 실천이 가져올 결과들을 분석적, 경험적 근거로 제시하는 정치학을 추구하고 있다. 둘째, 두 개의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토론함으로써, 정치적 평등의 증진 혹은 퇴보를 가져올 중요한 실천적 변수들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핵심적인 변수가 무엇인가?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달은 소비자주의(consumerism)와 시민정신(citizenship)을 대비시킨다. 달이 보기에 시장 자본주의 경제는 소비자로서의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문화를 증진시킨다. 특히 절대적인 소비 수준이 추가 소비의 한계 효용이 작은 수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 이러한 욕망의 충족이 문화의 중심이 되었을 때는 정치적 불평등을 가로막는 여러 장벽들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반면, 사람들이 소비자주의의 문화로부터 벗어나,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정신의 문화를 이룩한다면, 두 번째의 긍정적 시나리오로의 길이 열린다고 본다. 사회 구성원들의 시민으로서의 참여가 늘어난다면, 정치적 평등을 직접적으로 증진하는 제도개혁(예컨대 정치자금에 대한 규제)이나 간접적으로 증진하는 제도개혁(예컨대 교육기회의 확대, 소득 불평등의 완화) 등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과연 시민정신의 문화가 소비자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달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상품 소비를 극대화하는 경향과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소비가 충족된 이후에는 다른 형태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과 충돌한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미 상당한 부를 성취한 사회에서 시민정신을 강조하는 문화적 움직임은 더 많은 활동적인 시민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러한 시민의 참여가 궁극적으로 시민정신의 문화를 가져와서 정치적 불평등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평등의 증진이라 할 수 있는 투표권 확대의 초기 역사를 본다면, 그것의 핵심 추동력이 시민정신에 있었는지 혹은 투표권이 함의하는 노동계급의 경제적 이익에 있었는지가 분명치 않다. 둘째, 달은 참여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때때로 선거로 당선된 정치인과 평범한 시민 사이의 불평등을 이야기하는데, 내게는 이 비교는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현시대의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정당이라는 정책의 공급자 간 경쟁과 그 소비자로서의 유권자의 상호 작용 또한 중요한 메커니즘인데,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한 정치적 불평등의 해소 또한 배제될 필요가 없다. 반면 참여 민주주의의 과정이 오히려 집합 행동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쉽게 풀 수 있는 집단들의 과대 대표라는 불평등을 낳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인 일표의 형식적 권리를 넘어서는 정치적 평등의 이상을 추구라는 달의 목표에 나는 크게 공감한다. 또한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정신이 더 평등한 민주정치를 위한 좋은 바탕이 될 거라는 그의 주장은 정치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정치이론가 혹은 철학자로 잘 알려졌지만, 달은 홉스나 스피노자처럼 엄밀한 연역적 논리를 추구하는 이론가는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현실의 정치권력이 움직여가는 방향, 그에 따라 사람들의 행불행이 정해지는 양태를 면밀히 관찰하였고, 그걸 기반으로 귀납과 연역을 반복하였다. 공허한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해석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실의 나열보다는 이성의 비판을 추구하는 실사구시의 학자였다. 이제 영면에 든, 이 20세기의 지적 거인이 짧지 않은 인생 동안 이룩한 학문적 노력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 민주주의론의 대부 로버트 달. 그는 구체적인 해석과 이성의 비판을 동시에 추구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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