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환경문제가 대두하기 이전에 환경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1935년 『풍토』라는 책을 쓴 와츠지 데츠로라는 철학자다. 한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와츠지는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약재들의 효능을 주워들어서인지, 풍토가 낳는 다양한 식생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첫 역작인 『풍토』도 독일로 유학을 가는 길에 경험한 바다와 다양한 풍토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남중국해, 인도양, 아라비아해와 홍해, 그리고 지중해를 지나면서, 열기와 습기가 결합한 몬순, 극한의 열기가 가득한 사막, 그리고 온화한 목초지대를 경험한다. 자신을 키운 몬순의 풍토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이처럼 다른 풍토와의 대면을 통해서였다.

 이 와츠지의 영향으로 나는 요즘 환경을 자연이라는 말 대신 풍경이나 풍토라는 말로 이해하는 데에 천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달리다 힐끗 옆을 보면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우리의 풍경이 있다. 산자락이 이리저리 겹치는 풍경이다. 가까운 자락은 녹색빛을 띄다가, 뒤로 갈수록 색깔이 엷어지더니 맨 뒤에 있는 산자락은 하도 엷어서 파란 하늘과 섞이는 것만 같다. 층이 겹치며 색깔이 엷어지는 모습…그러다가 녹색이 파란색으로 변하는 것이 우리의 풍광이다. 녹색은 파란색. 헷갈린다.

 십수 년을 살면서도 무심코 지나치던 이 풍경의 독특함을 깨닫게 된 것은 와츠지처럼 다른 풍토와의 대면을 통해서였다. 그리스의 파르나서스 산 중턱에 선 델피 성소의 꼭대기 즈음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우리의 풍경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장관을 발견한다. 발아래로는 아무런 가릴 것 없이 펼쳐진 극장 하나가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로는 기초와 기둥만 남은 아폴로 신의 신전이 눈에 들어온다. 신전 너머로는 계곡이 창창히 굽이쳐 내려가다가 어느 틈엔가 다시 산이 되어 우뚝 솟아오르는 것이 가히 장관이다. 산길을 갈지자로 따로 올라오다가 문득문득 뒤돌아볼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이 장관은 바로 습기가 없는 투명한 대기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꽃송이들,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 그리고 먼 산의 프로파일 - 모두 다 선명하게 보인다. 커다란 천공의 공간 속에 하나하나의 개별자들이 가린 것 없이 드러나서 거리감 없이 한 평면에 달라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의 대표적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옥외극장이 발달한 이유도 풍토적이다. 따뜻하기도 하지만, 습기가 끼지 않은 건조한 대기가 먼발치에 선 배우의 대사며 몸짓을 또렷이 전달해준다.

 이런 그리스의 풍경을 접하고서야 나는 우리 풍경의 독특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산자락이 겹이 지는 풍경은 습기가 적은 프레리에서는 볼 수 없는 몬순지대의 독특한 현상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스의 투명한 대기가 거침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포르노그라픽한 풍경이라면, 우리의 풍경은 다 보여주지 아니하고, '뒤'에 대한 존재감과 양파껍질 같은 무한대의 깊이감을 자극하는 에로티시즘의 풍경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먹물이 번져가는 화선지에 안개가 낀 산수화를 옛 선인들이 즐겨 그렸던 것도 어찌 보면 바로 이 습기의 풍토가 낳은 문화적 산물일는지도 모른다. 안개나 구름이 쉽사리 끼지 않는 그리스의 땅에서 어느화가가 산수화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싶어서이다.

 차이의 마력을 지닌 풍경과 풍경의 만남 속에 문화를 이해하는 비밀이 담겨 있다. 내가 자란 풍경은 다른 풍경을 발견하는 거울이 되고, 반대로 다른 풍경은 내가 자란 풍경을 발견하는 거울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자기발견이란 이처럼 바깥세계, 즉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동시적 사건으로, 자폐적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관계의 변증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 세상의 이곳 저곳을 방랑하는 ‘풍경류행(風景流行)’을 한번쯤은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이유이다.

백진교수
건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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