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하며

근현대사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비극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로부터 배우기 위한 여행으로 ‘다크투어리즘’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기념관을 둘러보는 행위 등은 비극적인 역사를 관광처럼 가벼운 기억으로 남길 우려가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장소와 그것을 겪은 사람이 아닐까.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볼 수 있는 5·18 민주화운동과 6·25 전쟁에 대해 각각 장소와 사람이라는 키워드로 여행을 계획했다. 이를 통해 장소가 어떤 의미가 있고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과거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그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고자 한다.


광주 기행

“아무도 말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는데 어떡합니까.”

담당자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세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분들이 5월만 되면 아직 눈물이 난답니다.” 30년간 입 밖에 내지 못할 슬픔은 어떠한 것인가. 결국, 처음 계획했던 5·18 민주화운동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한 채 광주로 가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전남대학교였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경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계엄 해제’와 ‘휴교령 철폐’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 정문에는 두 부류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한 무리는 색채가 없는 사진 속에서 군 장병과 대치하고 있었고 한 무리는 배낭을 메고 학교를 드나들고 있었다. 시위하던 학생들은 기념비로 조그맣게 남아 있었다. 기념비 옆에서 소개하는 ‘오월인권길 횃불코스’를 따라 여행을 계속했다.

 

시위대의 발걸음을 따라 다음에 도착한 곳은 5·18 최초 발포지인 광주고등학교였다. 광주고등학교 앞에 나 있는 길은 중앙로라고 불리는데, 중앙로를 따라서는 헌책방들이 늘어서 있다. 헌책방을 곁눈질하며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길거리 전체에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기는 이곳에서 계엄군은 시위대에게 처음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히는 광주고등학교와 구 계림파출소 사이였는데, 총격을 당한 사람은 김영찬 군으로 당시 18세였다.

 

이러한 과잉진압을 세상에 알려야 했던 언론은 눈앞의 참상에서 눈을 돌렸다. 곳곳에서 군경과 대치하던 시위대의 발길은 거짓만 보도하던 언론사로 향했다. 광주 MBC 건물이 불에 탔다. 현재 그 자리에는 경찰학원이 자리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전남여자고등학교가 있고 학생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가운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녹두서점과 YWCA 옛터를 거쳐 간 곳은 금남로 일대였다. 금남로는 가장 치열하게 시위가 벌어진 장소이다. 유혈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을 향해 발포해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고, 시외전화가 두절되면서 광주는 외부와 서서히 고립되어갔다. 계엄군에는 공수부대와 장갑차가 투입됐다. 이에 맞서 시민은 자동차공장에서 획득한 군용트럭과 장갑차로 맞섰다. 시민의 저항에 군은 잠시 물러났지만, 시민 모두 결코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현재의 금남로는 치열한 항쟁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없는 번화가로 남아있다. 금남로에 새로 설립되고 있는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만이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사의 흔적들은 결국 전시관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금남로의 끝에는 옛 전남도청이 있다. 옛 전남도청은 시민군들이 최후까지 남아서 저항하던 장소이다. 5월 26일이 되자 시민은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했음을 느꼈다. 곧 소탕 작전을 시작하니, 빨리 투항하라.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시내전화가 일제히 끊겼다. 시민은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귀가조치 시켰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시내로 진입해 도청을 포위했고 오전 5시 진압작전이 종료됐다.

 

여행하면서 계속 든 의문이 있다. 왜 5·18은 특별한가? 그 이유가 이곳 옛 전남도청에 있다. 그것은 최후까지 이곳에 남아서 저항하던 사람들 때문이다. 끝까지 남아있으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총을 내려놓지 않은 사람들 때문이다. 현재 옛 전남도청은 공사 중이다. 그 부지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고 있다. 아시아예술극장과 문화창조원, 아시아문화원 등이 이곳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문화공간 속에서 옛 전남도청 또한 하나의 기념비로 남지 않을까. 5·18 민주화운동의, 옛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분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철원 기행

“고향은 이북이에요. 함경북도 경성. 6·25 전쟁이 일어나고 중공군이 개입하니까 경성에 있는 사람 보고 다 후퇴하라고 했어요. 100리 이상을 후퇴하라고 해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다 피난을 가게 됐지. 피난하고 있는데 성진에서 3사단 모병이 있어서 지원입대를 했지요. 거기서 배를 타고 묵호항에서 내려가지고, 그렇게 군대 생활을 시작했어요. 나는 18연대에 배치됐는데, 거기가 백골부대에요. 그래가지고 주로 전방에서 전투를 하는데, 고지전투를 하면은, 인민군보다도 주로 중공군이랑 싸우는 거에요. 가들은 인해전술로 쌔카맣게 밀고 들어오는데 주로 밤에 쳐들어왔지. 그래서 우리는 주로 주간 전투를 하고 걔들은 야간 전투를 하는데, 그게 왜 그렇냐믄 우리는 낮에 미군 비행기의 지원을 받으니까 그 지원을 받을라믄 낮에 전투를 할 수밖에 없는 거요. 너무나 비참했어요. 인민군이 우리보다 화력이 더 쎈 것이, 가들은 야포를 고지 꼭대기까지 끄집고 올라가. 올라가서 쏘면 한 시간에 천 발 이상씩 포탄을 쏴요. 군대가 있으면 OP 전방부대가 있어서 후방부대랑 일주일에 한 번씩 교대를 하잖아, 거기에 신병이 가면 대부분 일주일을 못 버티고 다 죽어요. 그나마 운이 좋으먼 부상 당해가지고 오지. 부상자라 그러먼 주로 포탄 파편에 맞아가지고, 오히려 총상은 별로 없어요. 다 포탄 파편이지. 여튼 그래가 팔 떨어진 놈, 다리 떨어진 놈이 오는데 비극이지. 근데 가들은 부상당해서 살았다고 좋아들 했어요. 100만 원 벌고 살았다고. 밤이 되면은 중공군 놈들이 피리를 막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오는데 우리는 호를 파고 거기서 안 나오는 거야. 그렇게 싸우고 고지를 뺏기면 다시 낮에 우리가 공격하는 거지. 왜냐먼 시체를 찾아야 하니까. 그래서 시체를 찾아가지고 나오면 그 시체는 연영소대라고 있어요. 거기서 시체가 많으면 태워야 하니까 휘발유하고 나무 가지고 가서 거서 태워요. 태워서 잿더미를 보관했다가 그거를 부산으로 보냈지. 그렇게 일개 고지를 사수할라면, 이거 뭐 다섯 번 뺏겼다 다섯 번 탈환했다 이런 식이었어요. 전투가 비참한 거는 말로 할 수도 없고…. 그때는 국가에 대한 충성 이런 것보다도 우선 현실이 그러니까, 현실이 그러니까 거기에 적응을 하는 거야. 나도 뭐 이북에서 넘어와서 여기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망칠 데도 없고. 어디로 도망쳐? 갈 데가 없잖아. 막다른 골목이지. 그러니까 거기서 싸울 수밖에 없는 거야. 내가 군번이 07이에요. 07이 현지 입대 군번인데 나중에 육군 병원 있을 때 기록카드 정리하러 가서 보니까 거진 다 죽었더라고. 옆에서 전우가 죽는 것도 많이 봤지마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고, 정신없이 싸우는 거지. 그냥 아 죽었구나, 나는 살아서 다행이다. 이런 생각뿐이었지. 나도 그렇게 싸우다가 포탄 파편에 맞아서 눈하고 배 하고를 다쳤어요. 그래가지고 육군병원에서 제대를 하게 됐지.” (최창명•84)

 
 
 

“나는 고향이 평안북도 구성인데, 해방이 되고 평양에서 학교에 다녔어요. 그러다가 6·25 사변이 나는 바람에 월남하면서 사리원에서 현지입대했어. 1사단에 현지 입대했는데 실탄 사격 연습을 4, 5일간 사격 연습을 하고, 그때부터 전방에 바로 투입된 거지. 그렇게 가족들은 다 이북에 두고 혼자 월남을 했지. 처음에 전투할 때만 해도 우리는 군번이 없었어요. 군번도 없이 싸우다가 나중에 군번을 받아라, 그래서 군번을 받았지. 351 고지라고 있어요. 거기서 전투를 20일간 했는데, 낮에는 우리가 진격을 하고 밤에는 후퇴해서 고지를 뺏기고 그 짓을 20일간 했어요. 거기가 엄청 가파른 곳인데 한번은 밤에 보초를 서다가 오줌 세례를 받은 적도 있지요. 꼭대기 밑에 호에서 근무를 하는데 날이 흐린 날이 아닌데도 물이 떨어지더라고. 보니까 인민군들이 거기서 오줌을 싸고 있더라고요. 아무튼, 거기서 전우가 참 많이 죽었는데 국군은 너무 미약했어요. 오히려 인민군이 더 쎘지. 얼마나 열악했냐믄 장비 같은 것도 인민군이 더 좋은 걸 들고 있고 군수물자는 말할 것도 없고. 밥은 그때 노무자들이 지게에다 지고서 고지까지 지고 올라왔어. 주먹밥, 소금 친 주먹밥을 한 덩이씩 주면 그거 먹고 싸우러 나가는 거야. 저 동해안에 남강이라고 있어요, 남강. 거기서 수색을 하는데 한번은 인민군 포로를 하나 잡았어요. 이름도 다 잊어먹어서 모르는데 하여튼 걔가 19살이었어. 수색 임무를 할 적에 위에서 너네가 몇 명을 사살했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없다 이거야. 그래서 귀를 베어 오라 그랬어요. 내가 7개를 갖다가 정보과에다가 줬어요. 그걸 귀를 어느 한쪽이라도 잘라 갖다 주면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니까. 그렇게도 해봤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다가 휴전되기 전날이었어요. 휴전되기 2, 3일 전부턴 걔네들이 우리도 그렇고 걔네도 그렇고 있는 포탄 전부 쏠 때야. 그때 우리 대대장이 방공호에 있다가 포탄을 직통으로 맞고 돌아가셨더랬어. 그때 죽은 친구들도 그렇고…. 몇 시간만 더 있었어도 휴전이 되는 걸 그렇게 죽고 그랬어요. 그렇게 휴전이 되고 나도 제대를 했지. 전쟁할 때는 나는 고향이 이북이니까. 고향까지 갈 각오로 전쟁을 했었는데. 휴전하고 제대한 사람들이 60명 가까이 친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6명밖에 안 남았어요. 일 년에 한 번씩 친목회를 하는데, 작년에 다섯 명인가 모였더라고. 거진 이제 다 죽고. 이제 죽기 전에 고향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게 원인데…. 평안북도 구성. 구성군 노동면 운계동….” (정덕병•84)

 

여행을 마치고

광주에서 볼 수 있듯이 장소는 변한다. 장소란 결국 인간의 가치를 담은 공간이기 때문에 삶이 변하면 장소 또한 변할 수밖에 없다. 5·18 민주화운동, 6·25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곳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장소를 지켜야 한다. 더 정확하게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지켜야 한다. 무엇이 가치를 지켜나가는가? 철원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장소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이다. 장소와 함께 그 가치를 간직한 사람이 있을 때 그것은 큰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계승하고 후대에 이어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 아닐까.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