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 배낭여행의 메카, 카오산 지구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로 24시간 내내 활기를 띤다. 물가가 워낙 싸다 보니 장기 배낭여행자들이 이곳에 주로 묵고 있다. 이들은 하루를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시작한다. 후덥지근한 낮에 숙소에서 밀린 잠을 보충한 뒤 저녁 늦게 맥주 한 잔씩을 들고 거리로 나오면, 빽빽하게 들어찬 각종 술집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로 각국 여행자들의 대화가 오간다. 이름도, 국적도 모르는 사이지만 그 순간 카오산 지구 안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친밀감을 표할 수 있다. 함께 물담배를 피우면서 끝없는 몽롱함에 빠지거나, 길거리에서 춤을 출 수도 있다. 그 순간을 함께 즐기고 난 그들은 만날 때처럼 헤어질 때도 ‘쿨하게’ 헤어진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클럽 마카로니’에서 만난 다니엘 콜럿 씨(31)는 “매번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이 색다르고 즐겁다. 이곳은 완전한 자유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 카오산 지구의 밤거리. 태국 방콕 카오산 지구는 한밤중에도 자유의 공기를 느끼러 나온 여행객들로 시끌하다. 이곳엔 주류사회의 논리를 거부하는 소토코모리들이 장기 체류하고 있다.

카오산 지구에서도, 일본에서 온 ‘소토코모리’들은 번화가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 모여 산다. 후미진 거리 안 보기에도 상당히 허름한 숙박업소들이 여러 개 모여 있는데, 이곳은 일본인 여행자들만을 상대로 하는 게스트 하우스다. 비좁은 방 하나에 6명, 많게는 10명이 모여 사는 데 하루 숙박에 230바트(약 7,300원) 정도다. 대신 환경이 그다지 좋진 않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조립식 이층 침대 위의 시트는 몇 달째 갈지 않아 거무스름했다. 물이 잘 안 나오다보니 더운 날에도 씻지 못해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 중, ‘사쿠라 게스트 하우스’에서 와타나베 히데토시 씨(38)를 만날 수 있었다.

히데토시 씨는 7년 째 태국, 캄보디아, 인도 등지를 여행 중이었다. 카오산에 온 지는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물가가 비싸서 캄보디아로 돌아갈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카오산은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너무 많이 알려져서 전보다 물가가 3배 이상 뛰었어요.” 하지만 그가 자주 찾는 쌀국수집은 현지인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이라 한 그릇에 10바트, 우리 돈으로 320원 정도다. 그는 주로 여기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곤 한다. 그런 뒤에는 공원을 한 바퀴 돌거나, 친구들과 축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숙소 안에 있을 때는 주로 블로그를 탐색하고 일기를 쓴다. 저녁이 되면 숙소 아래층의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느슨한 생활을 이어가는 그는 이 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말에 “지금의 삶에 완전히 만족합니다. 이 행복은 여기서만 누릴 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안정된 직장을 가졌었지만 재미가 없었다. 이대로 끝없이 돈만 버는 기계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생각하니 어떻게든 빠져나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가족들이 보고 싶지는 않냐고 묻자 ‘…하지만 어쩔 수 없죠’라며 말을 흐렸다.

여행 경비가 떨어지면 일본으로 돌아와 ‘프리터족’이 된다. 주로 편의점, 공장 등지에서 단기적으로 일하며 잔업, 휴일근무 등을 도맡아 한다. 그래야 빨리 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토코모리 일상을 풀어낸 블로그로 인기가 많은 貧BP 씨(43)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며 한 달에 20만 엔씩 벌고 있다”며 “임상실험에도 참가 중이어서 세 달 동안 총 150만 엔(약 1,510만 원)을 벌게 되므로 다음 여행경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아이와 놀아주며 웃고 있는 소토코모리 타로 스미노씨

소토코모리(外籠もり)는 바깥에서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신조어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일본의 여행작가 시모가와 유지는 일본으로부터 도피해 외국에 거주하면서도 정작 여행에는 관심 없이 하루종일 방안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이들을 가리켜 소토코모리라 불렀다. 그런데 이 용어가 나태한 20대 전반의 단면을 보여주는 개념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점차 의미가 확장됐다. 여행문화연구가이자 서울대에서 인류학을 전공 중인 이민영(박사과정) 씨는 “현재 우리가 소토코모리라고 부르는 이들의 대다수는 사실상 일본인 장기체류자들을 일컫는다”고 했다. 주로 태국이나 인도 등 물가가 싸고 외국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하는 경향이 강한 아시아에 오래 머물며 경비가 떨어지면 다시 일본으로 와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만 원래 개념과 비슷할 뿐, 이들의 생활상은 매우 다양해 하나로 정의 하기 어렵다. 방안에 처박혀 히키코모리 생활을 몇 달간 하다가도, 이후 줄곧 밖에 나가 요가나 명상을 수행하거나 동료 배낭객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장기 배낭여행자와 소토코모리 간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기 여행 패턴은 비단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 더 이상 어려운 도전이 아니며, 그 과정에서 유의미한 무언가를 발굴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더 따뜻한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어서’와 같이 별것 아닌듯한 이유로 언제든 장기간 훌쩍 떠날 수 있다. 이민영 씨는 “이미 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북유럽 사람들이 스페인같이 따뜻한 나라에서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장기체류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며 “서구에서는 이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접근한다”고 지적했다.
동일한 변화가 일본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뿐인데, 일본 사회는 유독 이것을 병리적이고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접근한다. 이민영 씨는 “소토코모리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특정한 양상의 여행만이 옳다는 전제하에 현재의 변화상을 문제라 여기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 카오산 지구 내 일본인 여행자만 상대하는 숙박 업소 거리

실제로 일본 사회는 소토코모리를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실패한 잉여의 삶이라 비난하고 있다. 기성세대의 눈에 이들은 일본의 주류 시스템에 속해 생산적인 활동을 해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골칫덩이일 뿐이다. 전문가들은 “소토코모리가 문제인 이유는 그들이 일본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표준적인 삶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장기체류자들은 다른 나라 여행자와는 다르게 자신들이 일본 사회로부터 소외됐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민영 씨는 “서양 여행자들에 비해 우울증, 폭식 등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삶에 대한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며 “이들은 일본에서 ‘탈출했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자국에서의 삶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주류 사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박지환 학술교류부장(일본연구소)은 이것을 일본 특유의 ‘멤버십주의’로 풀어낸다. 일본은 전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고용을 축으로 하는 생활보장 시스템을 구축해 가족, 학교, 회사에 소속돼있어야 사회적 안정을 보장받도록 했다. 특히 60~80년대 초반의 고도 성장으로 누구나 어딘가에는 정규직으로 취직할 수 있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이들을 중심으로 사회경제적 기반을 다져갔다. 동시에 전후 세대는 국가의 경제 발전과 개인의 윤택한 삶을 동일시하게 됐다. 박 교수는 “이런 제도는 개인이 조직에 충성하길 요구하는 특유의 경직된 문화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조직에 속해있지 않은 소수 사람들은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90년대 경제위기 이후 기존 시스템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노동 유연화의 일환으로 기업은 비정규직 고용을 늘려갔고, 회사에 소속되는 것만으로는 안정이 보장되지 않게 됐다. 특히 새로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 세대가 시스템 붕괴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현재는 비정규직의 약 60%가 2~30대일 정도다. 남상욱 교수(일본연구소)는 “임금을 줄이려는 기업과 이에 반대하는 노조 간 협상의 결과로 신규 채용 시 정규직은 줄고 파견사원 등 비정규직이 크게 늘었다”며 “취직을 못 해 집도 없는 젊은 세대가 증가하면서 PC방 등 저가 서비스망이 사회안전망을 대신하는 ‘빈자 비즈니스’까지 등장했다”고 했다. 니트·프리터 증가 현상, 현대 일본 젊은이를 칭하는 워킹푸어, 하류 지향 등의 신조어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일본 사회에서 ‘멤버십주의’는 여전히 중심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다수 회사에서는 고등학교·대학교 졸업 예정자인 ‘신졸자’만을 채용하는 관행을 계속하고 있다. 한번 취업에 실패하면 영원히 정규직이 될 수 없다는 소리다. 박 교수는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면 회사나 사회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며 “일본의 젊은이들은 경직된 일본의 사회구조와 경제적인 불안정 속에서 무기력증과 폐색감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 사쿠라 게스트 하우스 내부

여행을 통해 무력감을 회복한다는 이들. 끝없는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의 추구는 더 이상 어떤 삶의 의미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자유분방한 배낭족들의 생각이다. ‘요즘 아이들은 욕심이 없다. 뭘 하려고 하지 않고, 뭐가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기성세대의 잔소리에 대해 이들은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하나?’라고 반문한다. 중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찾는 일이다. 더 이상 자본주의의 경직된 시스템 속에서 부품처럼 일하다 소모되면 버려지는 획일적인 삶을 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약대를 중퇴한 채 카오산에 정착한 타로 스미노 씨(22)는 “나의 정체성은 하루종일 요가를 하는 것과 같은 소소한 삶의 행복(small happiness)을 추구하는 데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경제 상황도 변화하고 있다. 일본 경제구조의 변화로 과거에 생산적으로 여겨지던 일자리가 점차 축소되고 서비스업의 비중이 늘어가고 있다. 남 교수는 “소비 성향 역시 미쯔비시·도요타 같은 대기업 제품에서 그리 비싸지 않은 핸드폰으로도 만족하는 쪽으로 소비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이 노동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이라도 경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엄연히 생산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정규직을 늘리고 완전고용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해결책만을 고수하고 있다. 거기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사회보장은 여전히 NPO(일본 비영리 시민단체)나 저가 서비스업의 몫이다. 남 교수는 “일본의 무책임한 구조에 대해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전쟁이 낫다’는 글이 회자될 정도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감정적 분노가 거세지고 있다”며 “이러한 분노가 재특회 활동 등으로 잘못 투사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른 삶에 대한 시도를 무조건 병리적인 것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일본 사회가 이 현상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과 물가는 비슷하면서도 시급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고, 일본보다 더 심한 계층격차와 물질주의적 경쟁 속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일본 취재•글•사진: 권민 객원기자 realmrals276@snu.kr
태국 취재: 변성엽 객원기자 bsy640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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