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슈퍼마켓이 들어서고 나서 이웃 사람들이 손님 안 줄었느냐고 그러더라. 당연히 줄었다. 우리 슈퍼도 가격이 싼 편인데 다 기업이 낸 슈퍼마켓으로 간다”

대구에서 꽤 오랜 기간 개인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이귀동 씨(44). 2년 전, 이 씨의 슈퍼에서 채 2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SSM(Super SuperMarket, 기업형 슈퍼마켓)이 들어섰다. 덕분에 이 씨는 장사를 접어야 할 정도로 치명적인 매출 급감을 경험했다.

대기업 체인점의 등쌀에 밀려 죽어 가는 골목상권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요원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으로 재화나 용역의 구매, 생산 등을 협동으로 영위하는 협동조합이 급부상했다. 강자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약자인 소상인들이 협동, 협력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번진 것이다. 2011년 공포된 협동조합기본법은 협동조합의 조직을 본격화시켰다.

대기업에 맞서 뭉친 소상인들, 코나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한국의 협동조합과 다르게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협동조합은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도매·소매 부문의 협동조합 조직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협동적 사업체가 큰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고 규모나 효율성 면에서 큰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유럽에서 대기업 체인 슈퍼마켓으로 골목상권이 죽어간다는 말은 다른 나라 말이었다. 슈퍼마켓 협동조합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국가와 도시들로부터 유입된 관광객을 가장 먼저 맞아주는 이탈리아 로마 떼르미니 역. 떼르미니 역사 1번 플랫폼 아래층에는 소매 유통업체들의 협동조합 중 하나인 코나드(CONAD)가 위치하고 있다. 깔끔한 외관과 작지 않은 매장 크기 때문에 대기업이 낸 SSM 중 하나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엄연한 협동조합 슈퍼마켓이다. 각종 채소류, 육류와 같은 식료품, 즉석 빵·피자, 그리고 와인과 같은 주류에 이르기까지 판매 상품도 다양하다. 코나드 자체 상표를 단 상품들도 마련돼 있다. 다른 상품들과 비교해 가격 경쟁력이 높을 뿐 아니라 질도 좋아 손님의 장바구니에 많이 담기고 있었다.

떼르미니역 10분 거리인 인디펜덴자 광장에도 코나드가 위치하고 있다. 관광지와 멀지 않은 곳이기에 관광객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까지 코나드에 몰려 장을 본다. 호스텔을 관리하고 있다는 프란치 씨(40)는 “코나드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며 “코나드에서 파는 상품은 믿고 살 수 있기 때문에 호스텔 식구들의 음식을 준비할 때와 같이 대량으로 식료품을 구입하려고 자주 이용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벌써 5년째 이탈리아에서 유학 중인 중국인 씨앙 웨이 씨(25)도 협동조합 슈퍼체인을 이용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까르푸와 같은 글로벌 체인 슈퍼마켓보다 코나드가 도심지역에서 잘 보여 자주 이용하게 된다”며 “쿱(COOP)이나 코나드와 같은 협동조합 슈퍼체인도 대기업의 슈퍼체인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상품의 질을 보장한다”고 말했다.

▲ 떼르미니 역 지하에 위치한 코나드 매장. 관광객부터 주민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사진: 강윤희 객원기자 atom422@snu.kr

코나드는 이탈리아 최대의 도소매업 소상인 협동조합으로 이탈리아 협동조합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볼로냐에서 처음 조직됐다. 소비자 협동조합인 ‘쿱(COOP) 이탈리아’와 함께 중·소매 유통업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주요 협동조합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유통업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지만 코나드는 유통업계 점유율 2위를 공고히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코나드는 지난해 10조 원 이상의 실적을 낸 것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1,400여 개 이상의 체인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약 1만 6천㎡ 이상의 규모를 갖추고 주로 식품을 판매하는 하이퍼 슈퍼마켓과 편의점까지 더한다면 3천 개가 넘는 규모의 체인이 소속된 셈이다.

소상인, 지역, 전국 단위로 연계된 시스템

원동력은 코나드의 견고한 협동조합 시스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코나드의 시스템은 크게 세 단계로 조직돼 있다. 가장 작은 단위의 협동조합으로써 소매판매처 상인연합은 중소 슈퍼마켓 상인들로 구성돼 있다. 이 조합들은 다시 지역별로 나뉘어 지역 협동조합을 이루고 지역 체계를 바탕으로 물류 및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지역별 협동조합이 모이게 되면 전국적인 컨소시엄이 형성되는데 컨소시엄은 전국 매장의 물류 및 유통 체계 전반을 관리하고 서비스,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등 코나드 협동조합 시스템을 완성시킨다. 코나드는 “복합적이고도 협력적인 협동조합 시스템이 소상인 연합에서 시작해 이제는 거대한 협동조합 기업으로 성장한 코나드를 오늘날까지 지탱시켜주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자체 브랜드 개발, 지역 연계 공급으로 상품경쟁력 높여

중앙 컨소시엄은 코나드 자체 상품을 기획하기도 한다. 가격경쟁력을 갖춘 동시에 코나드만의 질 높은 상품을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것이 자체 브랜드의 목적이다. ‘코나드’ 상표를 단 일반 상품에서부터 유기농 제품(코나드 비올로지코), 유아 제품(코나드 키즈) 그리고 각 지역 특산물을 상품화한 지역 상품도 내놓고 있다. 코나드 중앙 컨소시엄 농산물 생산부의 클라우디오 감베리니 관리자는 “현재 자체 브랜드의 상품 점유율은 전체의 30% 정도지만 2년 안으로 50%까지 달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지역과 연계된 공급 시스템을 활용해 코나드는 신선한 식료품을 발 빠르게 소비자에게 공급하고 있기도 하다. 바나나나 파인애플과 같이 기후로 인해 이탈리아 자국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농산물을 제외하면 코나드가 제공하는 농산물 공급의 약 94%가 지역에서 재배된 상품들이다. 덕분에 1년 내내 싱싱한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어 코나드는 과일과 야채를 공급하는 섹션을 특별히 ‘코나드 섹션’이라고 부르기를 자처할 정도다. 클라우디오 감베르니 관리자는 “평균적으로 1,000㎡ 이상 규모의 가게에는 10에서 15종의 사과나 7, 8종의 토마토가 진열되는 등의 상품 어쏘트먼트(assortment)를 가지고 있다”며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과일, 포도 등이나 건조과일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농산품을 1년 내내 싱싱한 상태로 소비자에게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비결, 사회분위기와 적응력

도소매, 슈퍼마켓 분야에서 이탈리아 협동조합이 크게 성공하게 된 비결은 이들의 발 빠른 적응력에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일찍이 조직되기 시작했던 이탈리아 협동조합들은 70년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운영상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몇몇 선도적인 협동조합들로부터 결단력 있는 대응이 시작됐는데 슈퍼마켓 협동조합들도 흐름을 인지하고 대응에 나선다. 일련의 합병과 보다 전문적인 시장 접근으로 슈퍼마켓 점포를 빠르게 현대화했고 단일 브랜드에 집중해 대대적인 광고 전략을 펼친 것이다.

협동조합을 장려하는 국가적 분위기와 글로벌 체인 슈퍼마켓, 대기업 체인 슈퍼마켓의 입점 및 확장을 규제하는 법안들도 코나드와 같은 협동조합의 결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 임실근 전무는 “사회주의 노동당이 영향을 끼쳤던 이탈리아 사회 분위기가 협동조합 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었다”며 “월마트와 같은 글로벌 체인 슈퍼마켓의 진출이 있었지만 중심지에 입주를 규제하는 법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때의 대형 슈퍼마켓 규제가 현재까지 지속돼 이탈리아는 소매점 출점 규제 제도를 두고 있으며 1,500~2,500㎡의 소매점은 시정부,2,500㎡ 초과 대규모 소매점은 주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제하고 있다. 또 대형 슈퍼마켓의 경우 일요일, 공휴일 의무적으로 폐점하도록 돼 있다.

“전국 단위의 협동조합 시스템 필요”

대기업 체인 슈퍼마켓의 득세에 국내에서도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지역 상인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은 지역 협동조합 다수를 보유한 소상인 협동조합 중 한 곳이다. 일찍이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은 단일 공동 브랜드인 ‘코사마트’를 내는 등 협동조합 정신에 기반해 대기업 슈퍼체인과 경쟁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은 “현재 협동조합에는 출자를 하고 있는 정회원이 전국적으로 5,500여 명에 이르고 준회원은 2만 5천 명에 이른다”며 “이들이 모여 지역별 협동조합을 이루고 있고 현재 50여 개의 지역 협동조합이 소속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이들 50여 개의 지역 협동조합이 전국 단위로 체계화되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 체인 슈퍼마켓과의 경쟁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컨설팅과 가격 경쟁력이 있는 자체 브랜드 생산 등을 담당할 중앙 시스템이 필요하다. 임 전무는 “협동조합이 자발성에 근거한 시스템이다 보니 중앙시스템을 구축할 유인이 부족하다”며 “컨설팅 등의 이점을 부각시켜 지역 협동조합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야 할 뿐 아니라 이를 장려할 중앙 정부의 일관된 지원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협동조합의 정신으로 뭉친 소상인들이 대기업의 대항마로 거듭났다. 지금 이들 협동조합은 대기업 슈퍼체인 못지 않은 힘을 과시하고 있다. 경쟁력이 약화된 국내 소상인들도 이 같은 전례에 착안해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탈리아의 전례가 우리나라에 깃들 수 있을지, 골목상권의 미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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