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유경 교수
국어국문학과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사들이 세월호 참사 관련 정보를 축소 내지 은폐했다고 해서 담당 기자들을 ‘기레기’(‘기자+쓰레기’의 합성어)로 부르는 현상이 빚어졌다고 한다. ‘부르는 대로’ 받아쓴다는 것이 비난의 핵심이다.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부르는 대로 받아쓰지 않겠다는 의지에 불탄 언론사 간의 지나친 취재 경쟁이 각종 강력범죄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심각한 2차 피해를 입힌다는 아픈 지적도 한창 터져 나왔던 터이다.

부르는 대로 받아쓰지 않는 기사 중에는 심층보도 외에 각종 미담(美談)류 기사들도 있다.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내주고 정작 자신은 살아나오지 못한 학생, 갑판 위까지 올라왔다가 반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급우를 찾으러 갔다가 참변을 당한 아이, 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애쓰다 숨진 선생님, 너희를 구하고 나서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말하고는 결국 따라 나오지 못한 승무원.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몇몇 고인을 의인ㆍ영웅으로 추앙하면서 이들을 의사자로 지정해달라는 청원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들린다.
미담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부르는 대로 받아쓰거나 피해자의 신상을 터는 기사보다 좀 더 낫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미담이란 “사람을 감동시킬 만큼 아름다운 내용을 가진 이야기”를 뜻한다. 참사 현장에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소중한 이들을 떠난 보낸 후 미담이라니. 이 마당에 과연 감동을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적어도 생존자나 유족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높은 뜻과 범접하기 어려운 용기를 폄하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담이 아름답지 않다고 감히 말하는 것은, 인간의 수준에조차 도달하지 못한 책임자들이 문제이지 초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이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 아니 평범한 인간이라고 부르기조차 아까운 이들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 현장에서, 지극히 인간적으로 행동하다가 우연히 생존하게 된 이들에게 부당한 죄책감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지도 살아남은 자를 위로하지도 못하는 이런 미담 기사들은 세월호 사건 피해자들이 겪은 사건의 ‘폭력성’을 부인하고 있다. 오카 마리가 『기억ㆍ서사』에서 역설했듯이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를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의 불행을 재현하는 작업들은 그 근원에 있어 사건의 폭력성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건이 정말로 독자/관객에게 육박해 그들의 주체성을 빼앗아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 독자는 사건의 실감을 향유하는 주체로 상정된다. ‘휴머니즘과 엔터테인먼트의 훌륭한 융합’인 셈이다. 생사가 엇갈리는 참혹한 현장에서 어떤 인간은 초인간이 되기도 한다는 서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누구인가? 반복하지만, 적어도 생존자나 유족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미담은 살아남은 자를 심지어 죽게 만들기도 했다. 극적으로 생환했던 단원고 교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에는 미담 기사의 몫이 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좀 더 비범했어야 한다고, 영웅적으로 행동했어야 한다고, 초인적 능력을 발휘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 단원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몇 명 구하고 구조됐느냐’라는 섬뜩한 질문이 오고 간다는데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나만 도망친 비겁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겁니다. 그러지 않게 해주세요.”

2000년 7월 부산 부일외고 1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버스 참사에서 살아남았던 한 여성이 우리에게 보내온 편지의 일부분이다. “생존자들과 남은 가족들이 절대 자신을 탓하게는 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호소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슴 뭉클한 미담 기사가 아니다. 무구한 생존자들에게 우리는 살아 돌아와서 장하다고 정말 기쁘다고 수없이 되풀이해 말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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