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혜리 연구원
CTL 글쓰기교실

모든 글에는 저자와 독자가 있다. 글을 쓸 때 글의 성격이나 목적에 맞게 독자를 상정해야 한다는 말은 가장 많이 언급되는 글쓰기 지침 중 하나이다. 그러나 독자를 적절히 상정하는 것 못지 않게 글을 쓰는 ‘나’, 즉 저자를 글에 맞게 규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글의 저자로서 ‘나’라는 인물은 현실의 나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저자로서의 ‘나’는 글마다 다르게 설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블로그에 올린 여행기의 저자인 ‘나’와 과제로 제출한 서평에 등장하는 ‘나’는 다르다. 가장 솔직한 저자가 등장하는 일기에서도 ‘나’는 어느 정도 가공되기 마련이다. 글을 쓰는 이의 머릿속에는 다양하고 정돈되지 않은 의견들이 뒤엉켜있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정하는 작업은 곧 이런 의견들의 간섭을 물리치며 일관된 목소리를 지닌 저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학문적 글에서도 저자의 설정은 중요하다. 나는 글쓰기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쓴 다양한 주제의 과제들과 마주하곤 한다. 이들이 글쓰기에서 겪는 어려움 역시 천차만별이지만, 종종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신입생에게서 자주 보이는 가장 기초적인 차원의 문제는 학문적 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학문적 글에서 저자와 독자를 적절히 구성하는 과정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학문적 글의 저자는 학자, 연구자, 전문가이다. 따라서 학문적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저자가 실제로는 학생이라도 스스로 연구자나 전문가라는 배역을 소화해야 한다. 절대로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과대 포장하거나 허세를 부려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글 한 편을 쓰기 위해서 관련 주제의 모든 문헌들을 섭렵해야만 한다는 말도 아니다. 연구자라는 배역을 맡는다는 것은 연구자의 시선으로 본다는 말이다. 연구자의 시선은 자신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들을 분석자로서 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학생의 시선으로 글을 쓴다면, 그저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상을 늘어놓게 되기 십상이다. 때로는 대가들의 저술에 토를 달아도 괜찮을까 소심해지기도 하겠지만, 저자가 무게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도록 걱정을 과감히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학문적 글에서는 독자 역시 학자, 연구자, 전문가로 설정된다. 그런데 과제로 제출하는 글을 쓸 때에는 여기서 한 수를 더 내다봐야 한다. 글에서 설정된 독자 외에 현실에서 글을 읽고 평가하는 교수라는 독자 역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학의 과제는 연구자를 대상으로 연구자가 쓰는 글을 표방하면서, 동시에 교수를 대상으로 학생이 쓰는 글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저자는 현실의 독자인 교수 역시 고려해야 한다. 교수는 독자이되, 읽고 싶은 것이 분명한 독자이다. 학생으로서 저자가 해야 할 일은 이 독자가 읽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과제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우선 파악하는 것이다. 주어진 과제가 관련 분야 자료의 숙독을 위함인지, 수업시간에 다룬 이론을 개별사례에 적용해 보기 위한 시도인지 혹은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사고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등을 조금이라도 고민해 본다면 한정된 자신의 자원을 어디에 집중시켜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글에 저자가 있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이가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자신을 새로 연마하여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자신을 수정하는 일은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 아무리 많은 글을 써도 쓸 때마다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독자가 읽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결국 글이란 저자와 독자의 대화이다. 글이 쓸 때마다 새로운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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