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창 박사과정
영어영문학과

세상 어디에도 죽음이 넘쳐흐르지 않는 곳이 없는 지금, 특별히 기억되지도 애도 되지도 않는 하나의 죽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열 달쯤 전, 서울대 박사과정생 한 명이 갑자기 죽었다. 오랜 기간 공들여 쓴 석사논문이 통과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았다. 학교를 떠나 있던 나는 다른 이들을 거쳐서 이야기를 들었다. 무리하게 일했던 것이 원인이라고들 했다. 부유하지 않았기에 돈이 필요했고 수많은 프로젝트를 맡았다. 건강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는 있었지만 병원비가 부담스러웠고 일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생전에 술조차 별로 마시지 않았던 그는 갑자기 쓰러졌고 치료받기도 전에 숨졌다. 그렇게 지금까지 학교에서 마주친 사람들 중 (과는 다를지언정) 가장 온후하고 성실한 이를 조의조차 표하지 못하고 잃었다. 서른을 살짝 넘긴 나이였다.

반년 쯤 뒤 나도 박사과정생이 되었다. 풍족하진 않으나 다행히 부양할 가족은 없다. 감사하게도 첫 학기 GSI를 받았다. 물론 GSI만으로는 생존이 안 된다. 조교를 하나 더 맡았고 생활규모를 최대한 줄였다. 많지 않던 취미도 거의 없앴다. 기숙사도 제일 싼 곳이다. 책값은 방학 내내 번 돈과 가끔 들어오는 단기 아르바이트로 해결한다. 식비와 통신비를 합하면 수입과 거의 맞아 떨어진다. 지금 삶에는 별 불만이 없으나 조교계약이 끝나는 여름방학부터가 진짜 문제다. ‘고용 불안정’을 뉴스가 아닌 현실로 마주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싶어 입학했지만 유학 간 선배들은 헛소리로 취급한다. 일자리와 생활비를 보장받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부조리하지 않은가.

기초학문분야에서, 가난한 자가 연구자가 되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그때까지 비용은 거의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적지 않은 대학원생들이 우울증을 앓는다는 사실이 이와 무관할까?). 기초학문이 사회를 위한 공적인 영역이라면 학문후속세대를 위한 환경조성 또한 공적인 책무여야 할 것이다. 물론 ‘연구중심대학’ 서울대는 연구자를 양성하지 않는다. 누군가 자조적으로 읊조리듯 연구자를 직접 기르는 대신 수입해 오는 쪽이 더 싸고 효율이 좋기 때문일까? 기초학문지원 장학금은 생겼지만 교수들도 그게 오래 지속될 거라 믿지 않는다. 총장선거에 최초 입후보한 열 두 명의 응모서류를 전부 읽었다. 대학원생의 생활환경, 교육환경을 말하는 이는 없다. 이런 취급엔 익숙해서 화가 나지도 않는다. 학교에서 친히 만들어준 대학원 총협의회는 단과대 간 소개팅 이상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진 않고, 인권센터에게 대학원생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학과 및 교수들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애초에 학교에서 연구자 양성에 무관심한 이상 사태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건 당연하다.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태평양 너머를 보라.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고인의 학위논문을 찾았다. ‘개인 저자’ 항목에는 출생연도만 적혀 있다. 아직도 그의 죽음을 모르는 서울대는 그를 살아있는 저자로 표기해 놓았다. 죽음에도 무감각한데 삶 따위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5월에는 늦게나마 고인의 묘에 다녀오려 한다. 그때에도 누군가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여전히 학교는 무심히 지나치리라는 것, 우리 대학원생 모두는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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