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사회 전반에 걸쳐 소위 ‘인문학 열풍’이 불며 고전이 주목받고 있다. 연극계 역시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고전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는 추세다. 특히 올해는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및 안톤 체홉 서거 110주년을 맞아 ‘맥베스’와 ‘검은 옷의 수도사’가 공연됐다. 이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와 같은 익숙한 작가의 소설에서부터 1978년 초연 당시에 파격적으로 여겨졌던 페터 한트케 원작 연극 ‘관객모독’까지 다양한 고전 소설이나 고전 연극이 관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읽히며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주는 고전은 연극 제작진이 다양한 연극 연출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


고전을 다시 상연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작품이 써질 당시 작가의 의도를 최대치로 되살리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원작자의 의도를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작가가 살던 시대의 맥락에서 작품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원작은 1972년에 극작가 아톨 후가드와 흑인 배우들이 합작해 만든 것이다. 이 연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 인종분리정책을 다룬 고발적인 성격의 작품이다. ‘아일랜드’ 제작팀은 작가 아톨 후가드의 일생을 공부했다. 이는 작품이 쓰인 시대적 흐름과 그 당시 작가의 기분 등을 추적해 그의 의도를 잘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무대도 원작의 배경인 로벤 섬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다. 로벤 섬은 넬슨 만델라가 감금돼 있던 섬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암울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닥은 모래로 채웠으며 아프리카 노래와 민속춤을 사용해 작품을 더 강렬하게 구현해냈다. ‘아일랜드’의 기획팀장 김정아 씨는 “연극을 만들면서 제작진은 작품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소연 평론가는 “연극 제작팀이 고전을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따라 관객이 볼 수 있는 고전의 깊이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원작의 의도를 살리는 것 외에 연출가만의 시선으로 고전을 재해석하려 시도도 두드러진다. 고전은 제작진이 원작에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따라 관객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음악극으로 재탄생했다. 원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주인공인 고양이는 주인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며 인간들에게 조소의 시선을 던진다. 연극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극 중간중간에 노래와 음악을 삽입한 음악극 형식을 택했다. 이대웅 씨는 “고양이의 관점에서 인간 세상을 통렬하게 비판한 소설이지만 100여년 전에 써진 만큼 진부한 부분도 있어 이를 음악극 형식으로 보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원작의 적잖은 내용을 제한된 시간에 맞게 각색하다 생길 수 있는 비약적인 부분에 음악을 넣어 장면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연극의 독특한 점은 한 고양이의 시점을 배우 4명의 연기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이대웅 씨는 “독자가 긴 소설을 휴식 없이 쭉 읽을 때 느끼는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명이 돌아가며 고양이를 연기하게 했다”고 말했다.


원작의 배경을 바꾸거나 인물을 재구성한 연극도 있다. 러시아 작가 체호프 원작의 희곡 ‘갈매기’의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바꾼다든지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가 아닌 악마 메피스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식이다. ‘운악’은 국어교과서에도 수록된 소설인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각색한 연극이다. 연출을 맡은 양요윤 씨는 “주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운악’에는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 추가됐다. 사람의 운명 혹은 팔자를 의인화하여 표현한 ‘팔자’와 김 첨지의 친구인 ‘점쟁이‘는 원작과는 다르게 극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가기 위해 제작진이 새롭게 추가한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은 김 첨지와 인간의 운명에 관해 논쟁을 펼치면서 극의 흐름을 이끈다. 또 ‘오구’, ‘저승사자’, ‘지장새’ 등 우리나라의 신화와 민간신앙에 나오는 각종 신을 등장시켜 극의 분위기를 가볍고 재치있게 표현했다. 양요윤 씨는 “과장되고 정형화된 성격의 인물을 등장시켜 관객들이 극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한 연극들이 원작의 틀을 유지한 채 변주를 시도했다면 원작의 아이디어만 차용해 아예 새롭게 재구성한 연극도 있다.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돈키호테와 리어 왕이 서울역에서 만나 그들만의 나라를 만든다면?’이란 질문에서 출발한다. 노숙자인 돈키호테와 리어 왕은 그들만의 작은 나라를 만든다. 그리고 같은 노숙자 처지인 ‘소년’을 백성이라 칭하며 소년을 팔려고 하는 다른 노숙인들과 싸운다.
‘두 병사 이야기’는 보초를 선 두 병사의 시점에서 셰익스피어의 고전 『햄릿』을 희극적으로 풀어낸다. ‘왕족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개 병사들한테는 어떻게 여겨질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2인극은 보초 1명이 우연히 선왕의 유령과 햄릿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대화 내용을 전해 들은 다른 보초는 선왕이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됐다는 정보를 현재 왕인 폴로니어스에게 팔아 큰돈을 벌려 한다. 권력을 둘러싼 왕가의 비극도 병사들에겐 남 일일 뿐, 이들에겐 당장 먹고살 일이 더 중요하다. 연출자 석성예 씨는 “연극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도 『햄릿』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며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고전의 재해석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고전을 그대로 보존해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 한편, 고전엔 그 당시의 관습이나 관념이 반영돼있어 이를 현대에 맞게 변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고전이 써진 시대와 현대 사이엔 시대적 간극이 있기에 고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 시대에 맞춰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편 실험극을 온전히 창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비해 이미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갖춘 고전을 재료로 하면 보다 안정적으로 새로운 연출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다. 연출가 이대웅 씨는 “고전은 극을 풀어나갈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설명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 사람들의 고민과 지혜, 통찰이 담겨있는 고전. 고전은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관객에게 시공을 초월한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한다. 작품들이 관객에게 매력을 뽐내는 방식은 다양하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혹은 현대라는 옷을 입고 한껏 멋을 부리기도 한다. 앞으로 고전이 보여줄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된다.

▲ 삽화: 이예슬 기자 yiyeseul@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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