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농업’에서 ‘복지농업’으로
‘국방농업’에서 ‘복지농업’으로
  • 대학신문
  • 승인 2014.05.25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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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호 교수
농경제사회학부

대만 금문도(金門島). 대만 본섬과는 약 200km 떨어진 반면 중국과는 최단 거리가 2km 내외이다. 과거 중국과 수많은 전투를 겪은 대만의 최전방이다. 1953년 금문도 주둔군 사령관 호련(胡璉) 장군은 지역특성을 최대한 살려 고량주 제조를 위한 작은 양조장을 설치하였다. 열악한 환경 탓으로 농사짓기에는 어려운 곳이지만 지역 농민들에게 계약재배 형식으로 고량주 원료가 되는 수수를 생산하도록 했다. 산업보호를 통한 주민 거주는 국방의 최우선 수단임을 안 것이다. 따라서 당시 금문도의 수수생산은 경제성을 떠나 ‘국방농업’이었다. 이후 금문현(金門縣) 정부가 설치되면서 양조장은 금문현 정부에 귀속되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연간 국내외에서 약 6000억 원의 매출을 올려 현(縣) 정부에 약 2000억 원을 납입하는 세계적 명품 금문도 고량주 회사가 되었다. 이러한 튼튼한 재정을 바탕으로 지금도 수입 수수 가격에 비해 3배에 이르는 고가로 계약재배는 지속되고 농민들 복지는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수준이다. 분쟁이 종식되면서 국방농업은 ‘복지농업’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젊은 농업인 하추인(河秋仁, 44). 20대 초반에 고향인 금문도를 떠나 타이베이 등지에서 회사 생활도 해보았으나 도시 생활이 쉽지 않았다. 결혼 후 부인과 의기투합하여 고향으로 귀농을 결행하여 금년이 15년째이다. 놀란 것은 전체 경지면적이 6,000ha가 채 안 되는 작은 섬에서 이 사람이 경작하는 면적이 80ha라는 것이다. 수수와 밀을 번갈아 경작하는 대농이다. 안내하는 지방 정부 관계자께 수수와 밀 전업농 가운데 최소 규모에 속하는 농가를 소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임익(林益, 63). 과거 중공의 포격이 한참이던 때를 포함해 평생을 금문도를 지키며 농사만 지어 온 사람이다. 비록 형제들은 도시로 떠났지만 3남 2녀의 장남으로서 고향을 지켜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한다. 현재 경작면적이 7ha라고 한다. 우리나라 쌀 전업농을 생각하면 대규모에 해당된다.


어떻게 작은 섬에서 이런 대규모 영농 구조가 가능할까? 하(河) 씨의 경우 자기 농지는 전혀 없고 약 700여 농가로부터, 임(林) 씨의 경우는 가족 땅 일부를 포함하여 약 70여 농가로부터 임대하여 경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의미를 찾는다. 첫째 금문도 역시 농가 호당 경지면적을 따지면 텃밭 수준으로 작다는 것이다. 둘째 주민의 노령화가 심각한데 이들은 전업농에게 자기 토지를 빌려주고 임대료와 지방과 중앙 정부로부터 받는 복지혜택으로 충분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수수와 밀을 전업하여도 소득이 보장될 만큼 귀농의 유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두 사람 모두가 도시에 있는 친구나 형제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고백이 가능한 것은 고가의 계약재배를 통한 확실한 가격과 판매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60여 년 전 지역 주둔군 사령관의 국방농업 도입이라는 현명한 판단이 오늘날 복지농업의 초석이 된 것이다. 최근「대만 경제일보」는 ‘2013년 전국 행복지수 대조사’를 발표했다. 지수 78.1을 얻은 금문현이 전국 1위를 차지했다. 떠났던 주민들이 이제는 역류하고 새롭게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최근 8년간 인구가 지속적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작은 섬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나라 최전방 도서 서해 5도가 문득 생각난다. 2010년 연평도 포격이후 크고 작은 북한의 위협 가운데 긴장감을 놓지 못하고 있는 지역이다. 비록 섬이지만 농업이 주된 산업인 이곳에 어떤 현명한 국방농업이 도입되어 최전방의 영토가 관리되며, 훗날 복지농업의 초석이 되게 할 수 없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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