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일종의 직조공이다. 세계라는 거대한 의미의 그물망 한켠에 던져진 우리는 그 귀퉁이를 움켜잡아 이어나가기도, 또 끊어내려 애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외계와 맞닿은 신체가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감겨 언제든 되풀릴 준비를 한다. 경험을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과정. 사람들은 이를 ‘발화’, ‘글쓰기’, 좀 더 거창하게는 ‘담론적 실천 행위’ 등으로 명명한다. 그토록 허약해 보이는 말은 이렇게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유지하고 또 직접 구성해나간다.


그리고 숙련된 직조공들이 있다. 이들은 세계라는 거대한 옷감이 짜여지는 가장 첫 번째 단계를 ‘안다’고 말한다. 이들은 실타래의 유래를 통찰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지금과 여기를 가로지르는 의미론적 패턴을 ‘가장 그럴듯하게’ 재현해낼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설명은 많은 부분 이들에게 의존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직조공들은 이들이 지어낸 양식을 급하게 눈으로 좇으며 엉성하게나마 손이나 입을 놀릴 따름이다.


미숙련공들은 얼마간의 질시와 또 얼마간의 동경을 담은 시선을 이들에게 보낸다. 아니, 이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을 똑같이 직조하는 데 열중하느라 그럴 새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바느질이 손에 익은 직조공들은 결국 세계의 근원을 탐낼지어다. 자연스레 이들의 시기와 동경 어린 시선은 가장 숙련된 직조공들이 의미의 중핵을 통찰하는 그 순간으로 향할 것이다. 세계의 작동 원리를 포착했다고 알려진 자들. 지식과 체제라는 상호호혜적 시스템을 대변하는 이들의 이름은 ‘샤먼과 족장’에서 ‘성직자와 왕족’으로, 오늘날에는 다시 ‘과학자와 법률가’로 변천해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영감의 순간에는 다분히 연극적인 면이 있다. ‘사회라는 것’의 구성 원리를 명시화한 ‘법’은 어떠한가. 일련의 숙련공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조항을 레퍼런스 삼아 누군가를 심판하는 과정, 그리고 숙고 끝에 ‘법복’을 입고 ‘법봉’을 내려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이들은 모두가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원리에 가닿았다는 점에서 법의 신탁을 받는 신관이 된다. 이 원리가 ‘허용’한 이들은 배제된 자들이 갖지 못하는 어떤 신비로운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렇게 이들의 말과 글은 그 자체로 이 세계를 설명하는 증거가 되고, 자신의 경험이 이 증거에 의해 배반당해본 적이 없는 이들은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의심할 틈도 없이 부지런히 세계라는 그물을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일까.


숙련공들, 혹은 현대의 신관 집단의 또 다른 한 축에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의 생활세계를 가장 ‘메타’적으로 수식화한 문장들을 통해 이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들은 의미의 최소 단위를 파고 들어가는 만큼, 최대한 섬세하게 의미를 이어나가려 한다. 그런데 이들의 섬세함에 광신적 열정이 더해지면 도그마가 된다. 바느질 한 땀에서까지 세계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물신론자들. ‘가치중립성’의 논리로 은폐된 이들의 코드에 감히 개입하려 하는 외부인 혹은 내부 고발자는 ‘전문적이지 않다’는 간단한 반박으로 추방할 수 있다. 그들이 보는 것을 우리는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일까. 혹은 우리가 보는 것을 그들이 볼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근대의 탄생 이후, 소쉬르가『일반언어학강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준 메시지 중 하나는 세계를 의미론적 단위로 한땀 한땀 환원할 수 있다는 바로 그 믿음이었다. 이는 우리는 결국 공통의 지반을 가지는 직조공에 불과하며, 이 지반도 무수히 많은 ‘평등한’ 말과 행위의 교차로라는 것이다. 왕족과 신관 집단의 신성한 영역이 사실은 그토록 범상한 우리의 영역과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 오늘날의 생활과 정치를 형성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나왔다. 그렇기에 우리가 편입된 ‘현대’라는 사상사적 조건은 ‘신탁’이라는 불가해한, 어쩌면 전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론을 거부할 근거와 당위를 동시에 제공해준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는 ‘언어’로써 구성되고 인식된다는 근대적 명제로 돌아와야 한다. 언어는 사회화된 개인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디어라는 점에서 민주적이다. 그렇기에 언어로 구성된 모든 지식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다. 공유될 수 없는 지식, 반박할 수 없는 지식은 종교적 도그마가 지배하는 전근대의 시간축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탈주술화된 세계엔 언어의 직조공만이 있을 뿐, 그 어떠한 신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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