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2014년은 로맹 가리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로맹 가리의 삶은 그의 자서전 『새벽의 약속』에 잘 서술되어 있다. 자서전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어떻게 내가 현재의 ‘나 자신’이 되었는지를 서술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특이하게도 어머니가 주체처럼 보이고 작가 자신은 부차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의 어머니는 고기 기름을 몰래 닦아 먹으면서도 아들의 점심식사에는 비프스테이크를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인물로 제시되어 있다. 이혼한 상태에서 어렵게 살아온 이 어머니에게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은 미래에 대한 꿈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될 것이다’와 ‘이다’, 미래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 투사한다. 아들은 어머니의 자존심, 삶의 희망이 된다. 로맹 가리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드리리라”라고 결심하는데, 생의 의미를 건 이 약속 때문에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의 미래는 구분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미래의 단눈치오, 위고와 같은 대작가를 보았고, 그는 어머니의 예언대로 장교, 외교관, 소설가, 심지어 카사노바가 되어야 했다. 끊임없이 변모하는 카멜레온처럼, 로맹 가리는 ‘예언된’ 삶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원대한 꿈과 그가 직면한 현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다. 고생 끝에 곡예사처럼 공 여섯 개를 돌리게 되었을 때, 로맹 가리는 자신이 이루어낸 성취에 기뻐하기보다는 그 다음 공 돌리기에 도전한다. 자신의 무능력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그 다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예감되었지만 항상 능력밖에 있는” 마지막 공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다. 그 ‘마지막 공’은 만족시킬 수 없었던 어머니를 가리킨다. 한 여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면서도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상황에서도 동일한 구도가 반복된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전력을 다해 구해내야 하는 그녀는 어머니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동거했던 한 여자는 바람을 피우고는 “그 사람은 너를 너무 닮았어.”라고 변명한다. 유머와 아이러니 속에 적절히 감춰져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볼 때, 로맹 가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타인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으며, 또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이 자서전의 제목으로 ‘세상의 소유’를 고려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해야 했지만, 그 삶의 중심에는 ‘내’가 아니라 ‘어머니’가 놓여 있다. 그의 삶은 ‘내면화’한 어머니의 목소리, 예언과 약속의 산물이었다. 그는 희망에 저당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성찰하지 않는다. 다만 약속을 실천하려고 할 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로맹 가리는 자기 모습을 제대로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그가 ‘작은 어른’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자신이 ‘늙은 아이’였음을 발견한 것이다. 어머니 삶의 해피 앤드가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는 자서전에 독특한 형태의 ‘허구’를 도입한다. 어머니가 전장에 있는 그를 위해 병상에서 250통에 달하는 편지를 미리 써놓고 지속적으로 배달되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기 작가에 따르면 어머니의 편지는 없었다고 한다. 왜 사실을 말해야 하는 자서전에 허구를 도입한 것일까? 여기에서 현실의 공허함을 견뎌내기 위해 이미 죽은 어머니에게 다시 ‘접속’하려고 하는 아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편지를 통해 로맹 가리는 죽은 후에도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 모성애로 충만한 어머니라는 숭고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의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간직했던 의연한 존재, 아들의 승리를 예언한 예언자, 글쓰기의 기원이 되는 절대적 영감을 소유한 어머니, 인류의 선함과 정의를 믿었던 어머니로 되살아난다. 글쓰기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끊어진 탯줄을 잇는 행위가 되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행위, 삶의 근원에 접속하는 행위가 된다. 사라져버린 존재에게 형상과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의 자서전은 상실을 치유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를 정당화하고 사모곡을 써나갈수록 로맹 가리 자신은 어머니의 시선과 목소리에 사로잡힌 또 하나의 유령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자서전이 ‘자신’을 규명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 죽은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이 될 때, ‘나’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그에게 ‘나’의 자리는 타자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에게 완전히 홀려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삶은 타인에게 소유된 삶이고 자신의 삶은 없다는 의미에서 박탈된 삶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희망에 저당 잡힌 ‘박탈당한 삶’을 비판적으로 서술하면서도, 어머니의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는 어머니와 탯줄로 다시 연결되기를 원한다. 이로써 그의 ‘탄생’은 무한히 지연된다. 어머니를 위해 미래를 향해 질주해야 했던 그로서는 어머니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이상, 자기 삶을 창조할 수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로맹 가리가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벽의 약속’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시 질문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인생의 새벽에 그는 너무나 초라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아버렸고 그런 어머니를 차마 자신과 분리시킬 수 없었다. 독립된 개체로 성장하기 위해 탯줄을 끊어야 했던 그 시기에, 탯줄 끊기는 약속 위반으로, 또 어머니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했던 어머니, 숭고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성취해야 할 미래 쪽으로 아들을 내몰았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보여준 무한한 사랑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억압으로 느꼈던 아들의 인생을 읽다 보면, 과거의 자신을 애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태어나지 못한 로맹 가리의 상황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유호식 교수(불어불문학과)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