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책]

 

▲ 통섭과 지적 사기
이인식 저
인문과사상사
264쪽│1만 4천 원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에는 융합·통섭 열풍이 불고 있다. 대학에서는 학제적 연구를 통한 융합 학문이 유행이고 기업들은 통섭형 인재를 선호하고 있다. 통섭과 융합은 박근혜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의 핵심 키워드로 꼽히며 주목받기도 했다. ‘통섭’은 미국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책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번역한 최재천 교수가 원효 대사의 화엄사상을 담아 만든 표현으로 그 책이 2005년 한국에서 출간된 이후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통섭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을 의미하는 용어나 학문의 융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빈번히 쓰이면서 이제는 융합과 함께 보편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대중적인 관심과는 달리 통섭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있다. 최근 통섭이라는 개념과 그 빈번한 사용에 반발하는 저술가들의 글을 모은 책 『통섭과 지적 사기』가 출간됐다. 그들은 윌슨 교수의 주관적인 융합관이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며 그 융합관의 오류가 은폐되는 것을 우려한다.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은 융합이 박근혜정부의 제1 국정목표인 창조경제의 핵심 개념으로 제시되면서 덩달아 ‘통섭’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통섭의 오류를 지적한 여러 학자와 전문가 들의 글을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책의 출간 의의를 밝혔다.

2008년 『지식의 대융합』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융합에 대해 많은 강연을 하는 이인식 소장과 12명의 전문가들이 융합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통섭’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들이 반발하는 통섭에 담겨있는 윌슨의 융합관은 무엇일까?

책의 저자들은 학문 간의 융합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점에서는 윌슨 교수와 차이가 없지만 윌슨 교수가 주창한 ‘사회생물학’과 사회생물학의 관점이 반영된 ‘통섭’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사회생물학은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진화생물학을 바탕으로 생물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간결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모든 것이 유전자로 환원되기 때문에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적인 학문이다. 대표적으로 고인이 된 스티븐 제이 굴드 교수와 존 벡위드 교수(미국 하버드대 의학과)는 사회생물학이 유전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여 인류에게 큰 상처를 남긴 ‘우생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며 경계했다.

에드워드 윌슨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융합하는 방식에도 생물학 중심적인 환원주의를 그대로 끌어온다. 통섭은 윌슨의 표현을 빌리면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류가 뽑아든 마지막 검”인 과학의 바탕이 되는 ‘인과적인 설명’을 토대로 모든 현상을 남김없이 설명하겠다는 시도이다. 예를 들어 사회생물학은 윤리학과 도덕을 생존·번식을 위한 개체들의 행동으로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통섭과 지적 사기』의 인문사회학자들은 모두 이 통섭의 방식이 ‘제국주의적’이라며 반발한다. 융합을 위해서는 수평적인 교류가 필요한데 윌슨이 주장하는 방식은 과학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들이 흡수되는 방식으로 다른 학문들은 과학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윌슨의 관점이 담긴 통섭에 대한 비판 과정을 통해 진정한 학문 간 융합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성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이 ‘통섭’을 공격하며 마련한 토론의 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진정한 융합은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그 실마리는 최재천 교수가 ‘통섭’을 착안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원효 대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원효 대사는 서로 다른 불교 이론 사이의 회통을 추구한 대표작 『십문화쟁론』의 화쟁사상으로 유명하다. 화쟁 사상이 비교적 민감할 수 있는 교리의 융합을 추구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의 화쟁 방법이 두 학문의 소통과 융합의 전략이 될 수 있어 보인다.

그의 화쟁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각 주장의 부분적 타당성을 변별해서 수용하는 것과 언어의 방편적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남인 교수(철학과)가 융합 방식을 제안한 부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양자 사이의 학제적 연구는 양자 사이의 진정한 대화와 소통에 토대를 두고 이뤄져야 한다”며 “진정한 소통은 부분적인 통섭만 가능할 뿐 보편적 통섭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학문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학문이 생물학으로 수렴할 수 있다는 윌슨 교수의 환원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융합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의견 사이의 완전한 일치나 완전한 답에 대한 추구보다는 서로의 학문과 관점이 다른 만큼 타당한 부분을 변별하여 수용하는 태도가 학제 간 소통에 필수적이다.

이어 언어의 방편적 측면을 이해해야할 필요성에 대한 사례는 학계 간 갈등이 쌓여 1996년 앨런 소칼의 장난으로 드러나 대중에게도 알려진 이른바 ‘과학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과학자들은 사회학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과학에 대해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개념을 끌어다 글에 이용하는 것이 못마땅했고,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접근의 바탕에 과학에 적대적인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다. 두 학문 사이의 큰 간극은 서로의 의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인식이 점차 퍼지면서 과학전쟁 초반에는 원색적인 비난에 머물렀던 논의가 이후 익숙하지 않은 상대방의 문화적 행태를 이해하려 시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이번 통섭 논쟁도 비슷한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저자들은 ‘통섭’에 윌슨 교수의 제국주의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음을 우려했지만 실생활에서 통섭은 윌슨의 관점이 담기지 않은 단순한 융합 정도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의 주장은 독자들의 공감과 과학자들의 진지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보다는 ‘표현에 매몰된 비난’ 정도로 비춰질 위험이 있다. 책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융합에 대한 저자들의 열망과 진지한 논의 태도를 살려 생산적 논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양측이 모두 융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맥락과 의도가 바탕이 된 대화가 진행돼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학문 간 융합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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