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연구원 HK문명연구사업단이 주최한 제21회 해외저명학자 초청강연회가 지난달 25일(월) 신양인문학술정보관(4동)에서 열렸다. ‘저자와의 만남’ 형식을 띤 이번 강연회에선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코맥 매카시의 계승자로 평가받고 그레이스 팔리상 등 12개의 상을 수상한 미국 소설가 데이비드 밴 교수(영국 워릭대 영어 및 비교문학 전공)가 강연했다. 그는 「문학과 비극과 삶」이란 주제를 그의 소설 『자살의 전설』을 중심으로 강연했다. 손현주 교수(인문학연구원)는 “이번 강연을 통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소개하고 현대문학에 대한 청중들의 이해를 증진시켰으면 한다”고 강연회의 의의를 밝혔다.

▲ 사진: 김희엽 기자 hyukmin416@snu.kr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
연작에 담아

그의 데뷔작 『자살의 전설』은 아버지의 자살을 소재로 한 반자전적 소설집이다. 때문에 그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으로 얽혀있는 어릴 적 삶을 이야기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알래스카의 아다크 섬에서 태어나 케치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아버지의 외도 후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이사했다. 방학 때마다 그는 알래스카를 전전하는 아버지를 보러 갔다. 그가 13살 때 아버지는 그에게 알래스카에서 같이 지내자고 청했지만 그는 거절했고, 그 직후 아버지는 자살했다. 아버지의 자살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는 3년 동안 아버지가 암으로 죽었다고 말했고 15년 동안 아버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비극적인 삶을 산 그는 “글을 씀으로써 삶을 되돌아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삶의 비극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자살의 전설』에는 그 치료의 과정이 드러난다.

『자살의 전설』은 5개의 단편소설과 하나의 중편소설을 엮은 소설집이다. 6개의 소설은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란 로이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것이 공통적이지만 그 구조와 내용들은 사뭇 다르다. 이런 소설의 구성에 대해 저자는 “죽은 아버지에 대해 하나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수치심, 분노 등 여러 느낌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하나의 이야기만을 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살의 전설』이란 제목도 제프리 초서의 책 『선한 여인의 전설』에서 따온 것”이라며 “전설(legend)은 아버지의 자살에 대한 일련의 초상화를 뜻한다”고 제목의 의미를 설명했다. 각각의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을 드러낸다. 책의 첫 부분인 「어류학」은 매사에 무대책으로 대응하는 아버지의 생전 모습과 그의 자살을 로이가 회고하는 내용인 한편, 「케치칸」은 어른이 된 로이가 여행을 떠나 죽은 아버지의 내연녀를 만나면서 아버지의 외도를 동정하게 된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이다. 중편 「수콴 섬」은 저자가 자신이 알래스카로 갔다면 아버지는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속죄의 의미로 쓴 글이다.

한편 「수콴 섬」은 사실과는 다르게 아들이 자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알래스카로 오라는 아버지의 부름에 응한 로이와 아버지가 수콴 섬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인 「수콴 섬」은 아들의 자살로 인한 아버지의 파멸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뿐더러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복수로 해석되기도 한다. 저자는 아들이 자살한 내용에 대해 “글을 쓰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자살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글의 절반이 완성됐을 때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됐다”고 말했다. 그가 느낀 무의식의 잠재력은 그의 집필 방식과 문학론에 영향을 줬다. 그는 “무의식이 글에 드러났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계획을 짜고 글을 쓰지 않게 됐다”고 덧붙였으며, 무의식을 적극 활용하는 집필 방식을 낚시에 비유해 설명했다. 낚시에 걸린 물고기의 모습은 떠오르면서 계속 자라나 마침내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나타나듯이 무의식적 과정 속에서 자신의 글은 결국 괴물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글에서 아들이 복수심이 느껴졌다면 저자의 무의식에 복수심이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아들의 자살은 의도한 것은 아니고 심리적인 이유만 있을 뿐”이며 “아버지의 자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남겼지만, 아들의 자살을 겪은 아버지를 통해 감정의 묘사가 가능해진 효과는 있다”고 말했다.

선인의 길에서 찾은 문학론

이어 그는 자신의 문학론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우선 자신의 문학이 고전 그리스 비극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은 나를 신고전주의 작가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2,500년 전의 그리스인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 그는 “그리스 비극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에게 집중하며 장소와 시간이 제한된 작은 무대에서 인간의 운명을 다뤘다”고 설명했다. 그리스 비극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이끄는데, 『자살의 전설』에서도 아버지의 외도에 대한 집착이 결국 아들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에 대해 손 교수는 “영문학과 문학론에 정통하고, 자신의 문학을 문학사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그는 독특하다”고 평했다.

한편 그의 문학은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풍경 묘사가 두드러진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 코맥 맥카시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연 풍경의 기술을 통해 글의 주제나 등장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나보코프의 작품이 어떻게 문학론에 영향을 미쳤나?”라는 청중의 질문에 그는 나보코프의 작품에 등장하는 ‘지나가는 구름이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준다고 생각하는 소년’의 예를 들었다. 인물의 내면세계와 자연 상황을 연관 짓는 상징과 은유 기법을 나브코프로부터 영향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기법은 코맥 맥카시에게도 드러난다. 맥카시의 소설 『핏빛 자오선』에는 황량한 산맥을 두고 그것이 돌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역시 그가 설명한 풍경 묘사와 감정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자살의 전설』의 반자전적인 성격 때문에 강연회 말미의 질의응답은 작품 자체가 아닌 저자의 개인사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밴은 현실과 문학의 차이를 피력했다. 그는 “현실에선 무질서하고 상처투성인 것들이 작품이 되어 나오면 일관적이고 아름답게 된다”는 한편 “허구는 실제보다 더 삶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그는 실제 사건을 통한 아버지의 기억보다 「수콴 섬」의 내용을 통해 그가 아버지를 어떻게 느꼈는지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의 자살률이 최고 수준이라고 들었다. 문제는 자살을 한국인들이 수치로만 느낀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슬픔을 방치하면 좋지 않은 쪽으로 발현되기 마련이니 항상 이야기를 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모든 자살 뒤에는 일련의 이야기(legend)가 남는다”고 말한 데이비드 밴, 그 ‘이야기’를 문학으로 풀어가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과정은 자살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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