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이 하는 여러 일에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생일, 결혼기념일 등 특정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 무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삶에서 ‘의미’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의미 부여 속에서 삶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가 『향수』이후로 14년 만에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과 같은 저서에서 꾸준히 의미 부여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실상 우리가 믿고 있는 존재의 기반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냉소한다. 저자의 오랜 폭로 속에서 독자들은 존재의 ‘가벼움’을 깨달으며 동시에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밀란 쿤데라는 이번 저서인 『무의미의 축제』를 통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작가만의 깊은 통찰로 풀어간다.

이 소설은 먼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책 속에서 저자는 스탈린의 입을 통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말하며 삶의 무의미를 논한다. 쇼펜하우어는 객체의 표상 뒤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보는 세계 뒤에는 어떤 실재도 없으며 다만 표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해온 대상은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그들의 의지로 인해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더불어 개개인의 의지는 모방을 거듭하며 표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로 인해 표상은 획일화로 얼룩진다.

스탈린은 실재도, 표상도 허무하게 느껴지는 세계를 두고 의미 없는 농담을 던진다. 무의미를 깨달은 상황에서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라몽은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라고 말한다. 삶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며 엄숙한 의미의 세계에서 벗어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들도 사랑해야 비로소 삶의 민낯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행위는 삶의 무의미를 외면하려는 강박이 아니라 그것의 하찮고 부질없는 모습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포용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저자는 단순히 삶의 허무함에 함몰되지 않고 ‘의미 아니면 무의미’라는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그 경계에 선다. 그 경계에서 삶의 ‘가벼움’을 직시하고 장중한 사상과 세련된 언어로도 전복시킬 수 없는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삶에서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태도가 사람들에게 존재의 자유를 주고 삶의 무의미도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축제를 허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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