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수향 석사과정
미학과

시간은 속수무책이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버린 사람들을 어떻게 애도하고, 남은 이들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한 죄책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한 무력감을 양 손에 들고, 그런데 나는 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일까. 당장 알아야 하는 것들과 급히 행해야 하는 것들은 늘 책 밖에 있었는데. 언젠가 레닌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젊은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그 말에 기대보려다가도, 이것은 손쉬운 현실도피에 대한 알량한 자기변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 오랫동안 갸웃거렸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욥기」를 읽었다. 어느 누구보다 신실한 하느님의 자식이었던 욥은 ‘아무런 이유 없이’ 벌을 받는다. 재산은 불타고, 아들딸은 죽었으며, 부스럼이 그의 몸에 피어났다.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달려와서 “분명히 너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지”라고 설득하지만, 욥은 단호히 부정한다. “나에게 잘못은 없다, 그런데 대체 왜?” 구약의 이 짧은 이야기는 불가해한 고통을 향한 인간의 오래된 물음이다. 신이여, 우리더러 뭘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혹자들은 「욥기」로부터 “인과응보의 논리를 넘어서서 신의 권위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라(그곳에 구원이 있을지니)”는 다분히 ‘종교적’인 교훈을 끌어내는 것 같지만, 그것은 너무 막무가내여서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 그렇다면 거의 정반대에 위치한 지젝의 해석은 어떤가. 욥이 물었지만 신은 침묵했다. 그러니 욥의 고통으로 가장 난처해진 것은 다름 아닌 제 권위를 상실한, ‘무지한’ 하느님이다.(『예수는 괴물이다』) 절대자는 없다, 진리는 없다!

이것은 대타자의 결여에 천착해온 지젝다운 해석이지만, 혹시 저 신의 무지가 우리를 너무 서글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그래서 나는 차라리 리쾨르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보아라”(38:4)라고 신이 팔밀이를 하자 욥은 답했다.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42:5) 언뜻 동문서답처럼 여겨지는 이 대화를 두고 리쾨르는, 욥에겐 그저 세계를 설계한 신의 목소리를 접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고 설명한다. 신은 단 하나의 정답을 들려주는 것은 거절했지만, 대신 세계를 통해 모든 것을 우리 눈앞에 펼쳐내고 우리가 그것을 해석할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리를 향한 걸음이 “지금까지는 듣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해석의 갈등』) 내 공부가 한 줌의 정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면, 게다가 현재를 헌납하고 얻어질(까 말까한) 것이라면, 나에겐 별 쓸모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세계를 보고 해석하고 행동할 도구가 되어준다면 역시 저 말은 옳다.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오늘날에도 욥들은 묻는다. “절망에 빠진 이의 이야기는 바람에 날려도 좋단 말인가”(6:26) 아버지는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응답은 저 이야기들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묶어놓는 손이 되길. 앞으로의 내 시간이 책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뚫고 나와 그들에 닿을 수 있길. 학기의 초입에서 그렇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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