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은 종종 ‘어린 아이들이나 보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는 현재 공중파 3사에 편성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18개 중 13개가 영유아를 대상으로 편성된 것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성인이나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90년대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최근 개봉한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아동 뿐만이 아닌,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위기, 그 후 찾아온 반등의 불씨=90년대 말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대내외적 상황 변화로 위기에 처했다. 1998년부터 일본과 문호 개방으로 양질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들어오자 한국 애니메이션의 입지는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 문화 상품 소비가 축소된 것도 주된 이유였다. 비슷한 시기에 정부 차원에서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활동을 시작해 애니메이션 제작을 독려했으나 지원이 지속적이고 안정적이진 않았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국산 극장 애니메이션들이 흥행에 참패하며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크게 위축됐다. 이에 제작사들은 3D기술을 활용해 제작비를 낮추는 동시에 완구 등으로 부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에 집중했다. 2001년엔 「큐빅스」가 미국에 수출돼 호평을 받았고 「뽀롱뽀롱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변신자동차 또봇」 등이 크게 성공하며 이 추세는 한동안 유지됐다.


최근엔 아동용으로 치우쳤던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에 성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독특한 작품들이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유명한 동화를 각색한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은 어른들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스토리로 2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에서 개봉한 역대 애니메이션 중 동원 관객 수 11위에 올랐다. 연상호 감독은 관심병사와 군내 가혹행위를 다룬 「창」, 학교 폭력을 극적으로 그려낸 「돼지의 왕」,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한 「사이비」 등의 작품으로 사회를 날카로운 관점으로 묘사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이 외에도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대비되는 잔인한 묘사와 뮤지컬 같은 연출을 보여준 「파닥파닥」이나, 70년대 한국의 모습을 충실하게 고증해 향수를 자극하는 「소중한 날의 꿈」과 같은 작품도 나왔다.


그중 「소중한 날의 꿈」을 제작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는 오래 전부터 성인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작품들을 꾸준히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연필로 명상하기’는 애니메이션의 상업적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매몰되기보다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한혜진 감독과 안재훈 감독이 설립했다. 첫 작품 「히치콕의 어떤 일상(1998)」을 시작으로 「미안하다 사랑한다(2006)」, 「겨울연가(2009)」와 같은 여러 단편·중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으며 2011년에는 자사 첫 장편 「소중한 날의 꿈」으로 본격적인 주목을 받았다.


◇문학의 영상화로 세대를 아우르고자=‘연필로 명상하기’는 지난달 21일 두 번째 장편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으로 극장에 찾아왔다. 이는 성인들에게 이미 익숙한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문학 3개를 영상화한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다. 첫 번째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은 은은한 음악을 배경으로 달빛 아래 하나하나 그려진 메밀꽃밭의 모습을 통해 서정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경성의 모습 뒤로 하층민의 처절한 일상을 그려내 원작의 주제를 살렸다. 마지막 작품 「봄봄」은 과장된 묘사로 원작이 지닌 풍자의 의미를 살리는 동시에 모든 대사를 판소리로 처리해 해학성을 더한다.

▲ 사진제공: 연필로 명상하기

안재훈·한혜진 감독은 “‘뽀로로’와 같이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은 많지만 정작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은 없는 현실에서 단편문학 애니메이션이 어떤 화두를 던질 수 있다고 본다”며 이 작품을 만든 계기를 밝혔다. 이에 더해 “볼 것, 즐길 것이 많은 시대이기 때문에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문학 속 감성을 접하기 힘들다”며 “문학적 감성이 단절되기 전에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 모두 ‘우리’란 단어로 이어지게 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유명하고 개성 있는 소설들을 영상화하는 과정에선 어려움도 뒤따랐다. 각 작품들과 관련해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진은 평창, 춘천 등을 직접 방문해 소설 속 장소를 상상하고 구현하려 노력했다. 작품마다 특색이 달랐기에 취재한 자료를 바탕으로 영상화하는 것도 문제였다. 배경 미술을 담당한 김균석 씨는 “각 작품마다 작풍을 다르게 해야 했는데 한 작품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끝나버렸다”며 매번 배경을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했던 어려움을 털어놨다.


한국의 단편문학을 영상화하는 프로젝트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치유의 빛을 전하기 위해’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한혜진 감독은 “올해 말까지 상영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며 “현재도 멀티플렉스이외의 예술 영화 전용관에서 어머니, 아버지, 성인이 된 아들, 딸 그리고 조부모님들이 함께 관람하는 특별한 광경이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내년에는 「소나기」, 「무녀도」, 「벙어리 삼룡이」로 새 장편 애니메이션을 개봉하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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