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철 교수
물리천문학부

물리천문학부 천문전공에서 제공하는 ‘‘인간과 우주’라는 교양 과목이 있다. 현대 천문학이 밝힌 우주의 기원부터 시작해서 우주 진화의 정점인 생명의 탄생까지를 다룬다. 수강생들에게서 들려오는 불평 중의 하나는, 강의 제목과는 달리 ‘인간’은 다루지 않고 ‘우주’만 다룬다는 것이다. 강의 내용과 방법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유래했는지 한 학기 동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빅뱅과 우주배경복사, 암흑물질과 암흑 에너지, 별의 탄생과 폭발 등 여러 복잡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차라리 단군설화나 에덴동산 이야기와 같은 동화적 설정에 더 감성적으로 공명하는 것이 많을 것이고 그것이 과학의 시대라는 현대에도 신화와 설화의 고유한 가치와 힘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창조설화의 과학적 버전인 현대 우주론이 눈부시게 발하고 있는 거대한 빛은 일반인들에게 수학, 물리, 화학이라는 베일에 꽁꽁 싸여 감추인 계시로 남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학은 왜곡된 형태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많은 이들은 과학이 종교를 대치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과학의 모습은 종종 일그러진 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과학은 전능하다. 맘만 먹으면 인류를 파괴할 수도 있고, 환경, 에너지, 식량, 질병의 문제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도 있다. 과학은 복되다. 경제라는 말에 과학적 창의성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면 우리는 부강해질 수 있다. 과학은 명철의 근원이다. 명문대 입학이라는 꿈을 강요받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과학 영재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심지어 과학은 심판한다. 이른 새벽 정화수를 정성스럽게 떠놓고 군대에 간 자식을 위해 땅바닥이 흥건히 고이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는 그런 행위는 과학의 빛으로 계몽되지 못하고 유아기적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하는 무의미한 짓이며 결과적으로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에 과학의 이름으로 멸절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과장한 말이다. 하지만, 만일 암흑에너지를 탐사하는 연구자가 그 연구의 경제적 효과를 설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위의 이야기가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다가올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과 전통적인 종교가 대립되는 모습도 때론 우려를 일으킨다. 근본주의적 신념에 근거하여 생물의 진화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과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도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반종교적 감정을 극복하지 못할 때 얼마나 쉽게 스스로가 주장하는 과학적 합리성을 보기 좋게 배반하는지 그의 당황스러운 책 ‘만들어진 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상황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더욱 돋보인다.

과학이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던 냉전시대에 쓰여진 책이지만, 세이건은 결코 부강함에 대한 욕망을 과학이라는 권위에 투영시키지 않는다. 근본주의 종교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사회를 향하여 그의 무신론적인 관점과 그에 따른 과학적 사실의 철학적 해석을 결코 숨기지 않으면서도 함부로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이야기는 오히려 읽는 이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행복의 감정을 일깨운다.

그 감정은 걸음마를 갓 배운 아기가 혼자서 계단 하나에 올라설 때 느끼는 뿌듯함, 모래사장을 따라 한가로이 걸으며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를 상상하면서 느끼는 들뜬 마음, 생애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계획하면서 이런 저런 여행 정보 책자를 읽으며 빠져드는 몰입감과도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자연, 그리고 하늘의 질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생존과 실용적인 필요에서 시작한 것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고 허블이 외부 은하의 별들을 관측하여 우주의 팽창을 발견한 동기는 두어 살 먹은 어린 아이가 길거리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호기심어린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심정과 다르지 않다. 바로 미지의 세계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설레임’인 것이다. 『코스모스』는 칼 세이건이 일생 동안 우주를 탐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슴에 가득 채워 온 설레임을 대중과 나누는 이야기이다.

물론 과학자라고 항상 설렌 상태로 지낼 리는 없다. 케플러는 경제적 상황이 어려울 때면 점성술로 돈을 벌어야 했다. 갈릴레오는 종종 가톨릭의 핍박에 용감하게 맞서서 지동설을 수호한 영웅으로 묘사되지만, 그가 피렌체의 교수직을 얻기 위해 메디치 가문에게 얼마나 낯간지러운 아부를 했는지를 알면 헛웃음이 나올 것이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발생한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은 과학이 자본의 시녀로 전락해가는 환경에서 길을 잃은 과학자들이 어디까지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현대에도 과학자들은 직장을 구걸하던 갈릴레오처럼 그저 생계형 직업인일 뿐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저 자연의 신비가 우리의 땀과 경험을 통해 체현되어 나타날 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 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두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코스모스는 인간과 무관하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가 아니라 과학자라는 칭호를 단 것 외에는 남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인간들이 수천 년에 걸쳐 오류와 실패의 늪을 허우적거리고 헤쳐 나가면서 힘들게 탐험하고 구성해온 세계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라는 책의 제목은 하늘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용은 우리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코스모스는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한다. 코스모스를 탐색하는 일 역시 미래에도 멈추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칼 세이건이 설레는 가슴으로 바라보는 미래에는 외계 생명과 지구인이 조우한다. 행성천문학과 우주생물학이라는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그는 1996년 62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 전 세계 천문학계에서는 외계 행성계를 찾는 일에 한창 분주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태양계 밖에 있는 행성들의 성질과 통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에만 해도 지구와 크기가 비슷하고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행성이 무려 백억 개가 넘을 것임을 말해 준다. 외계 생명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우주에서 생명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도 칠레, 남아공, 그리고 호주에 세운 1.6미터 망원경들을 이용해서 외계 행성계를 찾는 KMTNet이라는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지구 밖에 존재하는 생명의 흔적을 찾는 일은 이제 그다지 먼 장래가 아닐 것이다. 항상 타자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해 왔던 우리는, 빅뱅 우주론과의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계 생명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해 또 한 번의 경이로운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온다면 이 책의 역자인 홍승수 교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코스모스는 인류역사를 바꾼 고전 중의 하나로 재평가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약간의 고민 끝에 이번 학기 ‘인간과 우주’ 수업의 주 교재로 이 책을 골랐다. 그 안에 담긴 현대 천문학적 내용은 지난 30여 년 동안 적지 않게 변해왔지만, 『코스모스』만큼 강의 목표와 잘 들어맞는 교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 코스모스
칼 세이건 저
홍승수 역
사이언스북스 l 719쪽
1만 8천 5백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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