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호 교수
농경제사회학부

가끔 음악을 듣거나 그림 또는 사진을 감상할 때, 반복되는 리듬이나 무늬가 있으면 마음이 한결 안정되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반복’되는 것들이 미리 다음을 예상하게 해서 불확실성을 줄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학교 선생도 매년 반복되는 것을 하는 것이니 그런 면에선 불확실성이 낮고 마음이 편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낮은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은 좋아하지만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은 싫어한다. 또 확실하다는 것 자체가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싫증을 낼 줄 아는 호기심의 동물이다. 강의실에 들어가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에 싫증이 난 교수는 매년 확실하게 반복되는 학교생활이 지긋지긋하다고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연구와 강의를 좋아하는 교수라도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면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래서 방학과 안식년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일 게다.

같은 학교생활을 하지만 학생들은 교수들과 전혀 입장이 다르다. 물론 매학기 강의 듣고 시험 보는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한다는 형식적인 점이 같기는 하지만 개설되는 강의가 다양하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 교수들과는 달리, 매우 흥미진진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전공 공부만 하는 것을 지루하게 생각하는 많은 학생이 자신의 전공과 다른 색다른 강의를 찾아 듣기도 하고, 복수전공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한 교양강의를 듣거나 복수전공을 택한 학생들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자는 학생들이 현재 무슨 짓을 하든지 그들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떠나지 않는 것은 소위 ‘스펙’에 대한 갈망이고 이것이 학생들이 어떤 강의를 듣든지 그 강의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든지 그 목적이 오직 한 가지라면 어찌 지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스펙’이라는 것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것이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서인데, 그 ‘스펙’이라는 놈이 학생들의 현재를 인질로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미래의 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고 ‘스펙’ 쌓기에 집중해야 하는가? 과연 확실한 것은 행복한 것인가? 행복한 것은 확실한 것인가?

필자 생각에는 학생들이 좀 더 모험을 했으면 한다. 대학에서 충분히 ‘스펙’을 쌓아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직장에 가서 무리 없는 인생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학생도 물론 있다. 사실 그러한 학생은 강의실에서도 그렇게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틀에 박힌 일상을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벌써 강의실에서 눈에 띈다. 그러한 학생은 ‘확실한 행복’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된다. 만약 자신이 그러한 학생이라면, 확실한 것을 지루하게 생각한다면, 오늘이라도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안일함에서 뛰쳐나와 남이 가보지 않은 길, 그러나 흥미진진한 길을 가기 위한 채비를 해야 한다.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용기’이다. 용기 있는 자는 미인뿐만 아니라 참된 행복도 차지할 수 있다. 필자는 ‘스펙’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강의를 듣는 용기 있는 학생, 행복한 학생을 강의실에서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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