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세계 곳곳 '극우' 세력들의 행동역학 ② 일본 넷우익

▲ 조관자 교수
일본연구소

지난 2월 일본의 도쿄도지사 선거에 넷우익의 전격 지지를 얻는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가 출마했다. 군사평론가인 그는 2008년에 정치적 활동이 금지된 자위대의 신분으로 “일본은 침략국가가 아니다”는 논문을 발표하여 물의를 일으킨 후 경질당한 인물이다. 그의 득표율은 12.5%로 4명의 후보 중 최하위에 그쳤다. 아베 정권을 지지하며 떠들썩하게 부상한 넷우익이지만, 그 독자적 정치 세력화는 미미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다만, 1980년대에 자조적 어투의 ‘폐인’ 이미지였던 오타쿠가 1990년대 중반부터 서브컬쳐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재조명됐듯이, 앞으로 넷우익의 존재감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배외주의

1992년 이후 일본의 비정규직 노동은 전 연령층에서 증가 추세다. 비혼(非婚)과 소자고령화*도 가중된다. 2013년, 25-34세 층에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인구는 30.3%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에서 글로벌리즘의 개방과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배타적 내셔널리즘과 지역주의가 강화된다. 미국과의 TPP 협정에 반대하는 풀뿌리 민족주의도 지역주의와 결합하고, 넷우익과 보수층의 지지를 받는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도 중앙정부와 대치하며 지역주의를 실천한다. 배외주의 조직인 ‘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모임’을 결성한 사쿠라이 마고토(櫻井誠)는 1972년 고도성장이 쇠퇴하는 시점에 규슈 지방에서 태어나 자랐고 1992년 성년의 나이에 거품경기의 붕괴를 맞이했다. ‘잃어버린 세대’의 선두주자인 그는 2012년 한국 대통령의 ‘천황 사죄’ 발언에 분노하여 거리로 뛰어나왔고 ‘반한 데모’를 주도했다.

넷우익의 부상은 '좌파의 몰락'을 반증하는가?

넷우익은 1990년대 말, 2channel(2ch)이라는 인터넷의 익명 게시판에서 탄생한다. ‘딴지일보’나 ‘다음 아고라’가 그렇듯이, 2ch은 오타쿠와 밀접한 유희적 성격을 보이다가 점차 정치화했다. 그것이 우경화로 나타난 것은 당시 일본 사회가 좌파 모드였음을 반증한다. 특히 일교조(日敎組) 교사들에게 반발하는 학생들이 우익의 포즈를 취했다.

젊은이의 보수화·우경화가 지적되지만, 사회 변혁의 욕구는 계승된다. 1960년대까지 좌익(左翼)이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를 내건 공산화 혁명을 추구했다면, 조직적인 좌익 세력은 아니지만 사요쿠(サヨク)는 소비사회의 ‘풍요 속 공허’를 채우기 위해 좌파적 가치에 공감하며 ‘일상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했다. 1983년에 나온 소설『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희유곡』과 1986년에 나온 평론『좌익이 사요쿠가 될 때』는 좌익의 정치 투쟁이 ‘사요쿠 취미’로 변한 상황을 말해 준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 불황이 지속되고 북한 핵위협과 중국 대국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취되는 가운데, 우익은 일상의 안전을 욕구하면서도 전후체제의 탈각을 통한 국가개혁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좌익의 전통적 운동론에서 보면 넷우익도 사회 변혁의 동력에 속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룸펜 프롤레타리아)와 청년·학생들은 체제 모순을 폭로하거나 대중운동의 기폭제로 활약한다. 다만, 전후 일본에서 그들을 의식화·조직화하여 체제 혁명을 기도했던 전위조직 운동은 모두 실패했다. 일본공산당은 1955년에 무장투쟁에서 의회주의로 돌아섰고, 공산당을 비판하던 신좌익의 혁명조직도 1970년대에 내부 폭력으로 자멸했다. 탈정치화된 소비사회에서 시민운동이 활발했지만, 이들도 냉전 해체 후의 역사 변화에 안일하게 대응했다. 대신에 전후체제의 타파를 추동하는 변혁 세력으로 민족파 신우익, 반미보수, 넷우익 등이 부상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넷우익은 배타적 애국심과 편협한 정보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집단으로 경원시된다.

역사수정주의와 반미민족주의의 '좌우 합작'

우경화의 노림수는 풀뿌리 민족주의에 기초한 ‘강한 국가’의 재건에 있다. 이것을 ‘좌파의 몰락’으로 진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좌파의 이념을 우파가 전유하고 실천하는 측면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반미 세력은 우익(전범)으로 심판 받았지만, 전후에 반미투쟁의 후예로 활약한 것은 좌익이었다.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90년대 중반까지 서브컬쳐를 주도하며 사회문제를 비평하고 시민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의 피해 보상을 돕던 대학생들이 목적의 실현 뒤에도 시민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본 고바야시는 특히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운동 그룹과 충돌했다. 고바야시는 젊은이들이 일상적 허무감을 극복하는 공공적 가치체계로서 국가관을 확립할 것을 제안하고 실천한다. “아시아 해방 전쟁에서 희생된 할아버지의 삶”을 이념적으로 재구성한 『전쟁론』1권이 출판되자, 좌파 지식인들의 반격이 집중됐다.

2000년대에 고바야시는 9.11테러에 동정하고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을 비판하는 ‘반미보수’로 활약하면서 다시 좌파와의 공감대를 넓혔다. 그는 과거 좌익의 ‘민족해방투쟁’ 역사관을 패러디한『전쟁론』 2권과 3권에서 ‘친미보수’를 미국의 충견으로 야유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에 대한 비판은 백인제국주의에 저항한 과거 일본의 ‘아시아해방 사관’을 긍정하고, 점령 정책의 산물인 전후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논리로 귀결됐다. ‘침략’을 ‘해방’으로 바꾸는 역사수정주의는 아시아의 반제민족운동과 좌파의 저항민족주의 어법을 당당하게 취한 것이다.

넷우익은 전후 일본을 미국의 ‘군사적 식민지’로 인식한다. 이는 중국공산당과 동아시아 좌파의 일본 인식과도 통한다. 그렇지만 정작 넷우익에게 인식 논리를 제공한 좌우파 모두가 넷우익과 ‘같은 편’으로 지목되길 꺼려한다. 고바야시 요시노리조차도 아베 정권과 넷우익의 결탁을 비판하고, 재특회의 배외주의에 유감을 표시한다. 고바야시 자신이 넷우익의 양산에 기여한 사실을 자각하거나 반성하는 기색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일본 내부에서도 ‘미운오리새끼’인 넷우익의 존재감은 그 부정적 가치를 적극 활용하는 정치권과 언론에 의해 더욱 커져버리고 말았다.

안팎의 구별이 불가능한 문제

마케팅 분석가인 미우라 아쓰시(三浦展)는 젊은이들의 소통능력과 노동의욕이 쇠퇴하고, 삶의 의욕이 총체적으로 저하된 일본사회를 ‘하류사회’로 부른다. 그런데 소비능력의 향상보다 사회적 활력을 욕구하며 정치에 눈뜬 젊은이들일수록 강자에 저항하고 애국심에 귀의하며, 수정주의 역사인식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넷우익은 승전국인 미국에 의한 역사 심판과 군사적 지배를 거부하며, 자위력 강화와 자주성 회복을 제기한다. 이 때, 반미 자주화는 좌파의 이념과 일맥상통하고, 무장평화는 한국과 중국의 방위론과 다름없다. 세계적 패권국가로 부상한 중국과 도덕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한국에 대해서도 그들은 ‘굴욕감’과 ‘저항의지’를 불태운다.

내셔널리즘은 좌우를 모두 포용한다. 문제는 동아시아 판도에서 내셔널리즘이 서로 충돌하는 것에 있다. 넷우익 문제에 대응할 때, 뫼비우스 띠처럼 펼쳐진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민족감정과 일국적 논리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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