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와 판옵티콘의 죄수들
미셸 푸코와 판옵티콘의 죄수들
  • 박치현 기자
  • 승인 2014.09.27 2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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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책] 정신의학의 권력

근래 우리 사회에 유머의 일환으로 ‘사이코패스 테스트’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내용으로 거의 잔혹한 살인을 다루고있는 이 테스트는 재미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변인들이 살인자로 돌변할 수 있는 정신이상자인지 검증하는 것이다. 일찍이 철학자 미셸 푸코는 광인(狂人)을 사회적 위험요소로 보고 이들을 현실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시도가 역사적으로 짧은 기간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규명한 바 있다. 위 현상은 푸코의 이런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데, 우리 사회가 ‘광인’과 ‘비정상’에 어떤 감정을 갖는지 잘 보여주는 것만 같다.

지난 7월 출간된 푸코의 『정신의학의 권력』은 『광기의 역사』에 이어 19세기 정신의학의 여명기에, 격리된 광기가 어떻게 관리되는지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푸코가 프랑스의 국립고등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서 1973~74년에 진행한 공개강연의 강의록이다. 강의록으로서 이 책은 『광기의 역사』 이후 『감시와 처벌』에 이르기까지 푸코의 주안점이 ‘비정상’이라는 관념에서 이를 둘러싼 권력의 미시물리학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편집자가 서문에서도 밝히듯 이 강의의 내용은 “이미 출간된 푸코의 어느 책과도 겹치는 부분이 없”을 뿐더러 강의록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차근히 읽어간다면 강의를 듣듯 그 내용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규율권력 그리고 군대, 학교, 감옥

『광기의 역사』가 근대의 산물인 ‘광기’라는 관념을 분석했다면, 『정신의학의 권력』에서 푸코는 그런 관념들을 산출하는 권력 장치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는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정신요양소’에서 실제 벌어진 ‘치료’를 실증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의사와 광인 사이에 형성되는 권력관계를 다룬다. 그가 바라본 정신요양소의 실상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광기의 역사』에서 주로 다뤄졌던 감금의 현실이 있다. 환자는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말을 진실로서 담보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더 이상 시민으로 불릴 수조차 없게 된다.

그가 시민으로서 가졌던 권력은 이제 정신요양원으로 전이돼 그를 향해 행사된다. 이런 정신요양소 안의 모든 권력행사의 목적은 광인을 현실세계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위해 행사되는 권력을 두 가지의 상반된 성격으로 구분한다. 그 중 하나는 ‘주권권력’이며 다른 하나는 ‘규율권력’인데, 푸코는 정신요양원의 권력체계가 19세기 중반부터 주권권력에서 규율권력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고 서술한다.

먼저 주권권력이란 권력을 행사하는 주권자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권력이라 할 수 있다. 그 특징으로는 주권자의 명확함과 그런 주권자로부터 제공되는 대가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봉건제도의 군주-신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규율권력이란 규율에 의한 통합적 권력으로, 자동적이며 따라서 그 주권자를 알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규율체계는 규율로 대표되는 시스템에 모든 구성요소가 녹아들어 하나의 목적을 가진 단일한 체계다. 모든 시스템 요소가 대상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대상에 대한 감시가 가능하며 결국 빈틈없는 포획을 가할 수 있게 된다. 현대의 군대는 이런 규율권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주권권력이 작용하던 때와 달리 현대의 군인은 그 일과와 사고방식까지 관리되며 항상 규율에 의한 익명의 감시에 놓여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정신요양소의 권력체계가 규율권력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광인에 대한 감금과 항상적인 감시가 강화되는 데서 시작한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광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19세기 초의 광인은 ‘착오하는 자’로서 대우받았다. 이 때 정신의학은 진실의 문제에 천착해 환자가 자신의 착오를 자각하고 이를 수정하도록 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광인의 감금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된 뒤 광기는 진실에 대한 착오라기보다는 사회에 해가 되는 ‘비정상’으로 인식됐다. 감금된 광인은 규율에 따르면서 그 행동이 예측될 수 있어야 했고, 동시에 24시간 감시받기 용이한 환경에 처해졌다. 항상 감시받는 환자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권력을 의식해야했고 그런 권력은 익명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진실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다만 19세기 초까지 의사가 판단하는 진실은 실제 사실을 기준으로 환자가 믿는 바가 얼마나 차이를 보이냐에 달려있었지만, 규율권력 안에서 의사는 현실의 규율체계에 합치하는 행동을 보이냐에 따라 환자의 광기를 결정지었다. 그럼으로써 19세기 중반 이후 정신요양원의 의사는 진실을 규명하기보다는 생산하는 존재였고 따라서 더욱 강화된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 기준이 규율체계에 있었기 때문에 의사는 그저 정신요양원의 운영자로도 대체될 수 있는 상태였다.

푸코는 이런 변화가 단지 정신요양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앞서 군대를 예로 들었듯이 질서가 필요한 거의 모든 사회공동체에 규율권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의 군대가 주권을 가진 사람들이 약탈 등으로 보수와 자신의 노고를 교환하는 주권권력의 장이었다면 규율권력이 장악한 군대는 개인을 거의 완전히 점유한다. 병사 개개인의 일과는 규율에 따라 예측되고 신체훈련이 강요되는 등 신체에의 구속이 크게 강화된다. 개개인의 병사가 감시의 눈이 돼 일탈은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푸코가 사례로 든 한 작업장의 규율은 노동자가 일정 시간에 일을 끝마치지 못하면 추가적 벌금을 냈고 지각·결근에 대한 처벌사항을 상세히 규정했으며 기분전환으로 보이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심지어 찬송과 외설적 잡담에 대한 규율까지 있으니 규율체계가 개인을 포획하는 정도를 가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규율권력은 단지 푸코가 분석한 19세기의 상황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위에서 묘사한 공장, 군대의 사례는 물론이고 학교, 감옥 등 현대사회에는 익명적 규율권력에 따라 구성원을 포획하고 체계에 어긋나는 요소를 ‘비정상’으로 솎아내는 공동체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런 공동체에서의 심리학전문가들의 출현을 주목한다. 이들은 각 공동체에서 정신요양소의 의사역할을 맡아 ‘정상’에서 벗어난 구성원을 대상으로 교정을 실시한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단지 200여 년 전의 정신요양소를 분석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지식과 권력, 아는 것이 힘이다?

19세기 정신요양소에 대한 푸코의 탐구는 규율권력이 보여주는 ‘비정상’에 대한 억압을 잘 보여주면서 초기의 정신의학이 환자로부터 획득한 극단적으로 비대칭적인 권력을 토대로 수행한 비인간적인 처우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규율권력의 폐해에도 학문적 지식으로서 정신의학이 기여하는 바를 무시할 수 없고 정신의학의 발전과 진단의 정교화로 인해 그 폐해도 줄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변화는 정신의학 지식의 발전으로 이뤄진 바가 크다. 푸코는 권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지식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인식을 통한 지식’으로 이미 주어진 사실을 발견해 얻는 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생산되는 지식’으로 특정 주체에 의해 결정되는 진실이다. 정신의학은 이 두 가지의 지식을 모두 갖고 있었다. 인식을 통한 지식으로서 정신의학은 임상의학을 통해 증상에 따라 병을 분류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고정된 원인을 찾아 지식체계를 확장해나간다. 이는 전문지식의 독점에 따른 권력 강화를 가져다주면서 실질적으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의 순기능도 증진시킬 수 있다. 동시에 생산되는 지식을 위해 정신요양소의 의사는 사회의 규율권력을 기준으로 누가 ‘비정상’ 내지 광인인지 결정함으로써 그 기준에 대한 지식을 생산한다. 이 때 정신의학 지식의 발전이란 전자의 정교화와 그로 인한 후자의 기능 약화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권력이 규율권력을 통해 개인을 예속했던 사례가 정신요양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생산되는 지식이 ‘비정상’을 규정하면서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광기’는 ‘비정상’의 이름으로 옅어져 온갖 사회공동체에 넓게 퍼졌고 이에 대한 권력의 억압도 미시적인 수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공식적인 ‘규정’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규율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윤일병 사망 사건도 이런 암묵적 규율에 어긋난 ‘비정상’을 19세기의 그 방식으로 아니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치유’하려 했던 것이 아닌지 싶다. 이런 지점을 포착하고 그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19세기 정신의학의 미시적 양태는 물론이고 푸코의 정신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 삽화: 최상희 기자 eehgna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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