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를 참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도 어떤 방법론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우선 이 세계에 절대적인 진리 따위란 없으며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누군가에는 정의일 수 있다고 전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으니 섣불리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세계의 복잡성과 본인의 무지함을 극적으로 대립시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그렇게 명백하게 부당한 사태를 보고도 최대한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순간,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감에 불타 괴로워해야 했던 어리석은 자신을 구해낼 수 있다.

이것이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불의에 분노하는 것 자체를 귀찮게 여기거나 아예 불의에 대한 판단기준 자체를 상실하여 어떤 일에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요즘 종편을 위시한 언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런 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식민지 시기는 근대화의 발판을 놓은 시절로, 쿠데타는 혁명으로, 독재는 산업화로 둔갑하는 이 시대에 비상식을 상식으로 수용하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갖춰야 할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가령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한 비상식적인 재판 결과 같은 것은 뇌리에서 재빨리 지워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국회를 정상화하자면서 비정상적인 협상태도를 보여주는 자들에게 극도의 피로감을 느낄지라도, 국민의 대다수가 뽑은 국회의원이니 그 상식에 맞추는 것이 국민 된 자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은 갖추기를 권유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불의를 참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 탓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루저’나 ‘잉여’라는 현실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현실부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정의가 아닌 것을 정의라고 우기는 망상의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 세월호 피로감 운운하며 폭식투쟁을 벌이고 이를 자랑스레 떠벌리는 몰지각한 일부 세력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불의를 참느라 자존감이 바닥을 칠지라도 자기비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는 정의마저 짓밟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 인간이 되기는 어렵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 삽화: 최상희 기자 eehgnas@snu.kr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속물로 가득한 사회가 지옥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상한’ 제안을 한다. 거룩한 속물이 되라. 고독의 자기의식을 가진, 자폭을 할 줄 아는 속물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고 말이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불의를 참을 수밖에 없는 잉여라는 사실이 아니다. 자기계발 담론이 유포하는 신화와는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을 잉여로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불의한 무대에 서 있는 사회자가 아니라 불의한 무대 그 자체를 바꾸라. 물론 당장에 그 일을 할 수 없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잉여니까. 자책하거나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 말고 조금씩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하자. 이것은 불의를 견딜 수밖에 없는 잉여이되, 그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들이 이 불의한 세상을 살아나가는 하나의 방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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