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씨 미안해요』, 김중일

 

 지금 창밖은 무슨 색입니까?

 창밖이... ...!


- 「태양에 대한 나의 고찰」부분

 1. 그림자라는 이름의 검은 우리

독일 작가 아달베르트 폰 샤미소가 쓴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1814)는, 주인공 페터 슐레밀이 금화가 나오는 주머니를 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팔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다. 그림자를 판 뒤로 슐레밀은 다니는 곳마다 “제대로 된 인간은 햇빛에 나오면 그림자도 따라와야 한다”며 온갖 비난을 받는데, 정작 소설 속에는 어째서 그림자가 제대로 된 인간의 필수 요건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재미있게도 작가인 샤미소 또한 작품이 출간된 이후 ‘슐레밀, 네 그림자는 어디 있지?’라며 놀림을 받고 마음고생을 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훗날 샤미소는 슐레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 이른다. “그림자가 도대체 무엇인가!”

김중일의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는 그런 그림자들에게 조명을 비추는 시집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그림자의 관계는 슐레밀의 그것처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한 것이 아니다. 그와 줄곧 같은 신발을 신어 온(「중력이란 이름의 신발주머니」) 그림자는, 자신의 일부인 동시에 외부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나’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어색하고, 그렇다고 아예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너’라고 부를 수는 없는, 말하자면 1인칭과 2인칭 사이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샤미소라면 이 애매함을 두고 “우리가 그림자에게 본질을 빌려주고는 이제 본질을 그림자와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개탄했겠지만, 시인은 기꺼이 그 혼동에서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동생(同生)이 죽었다.

동생은 죽어 지금 내 발목에 그림자 대신 매달려 있다. 동생은 나를 허공에 질질 끌며 땅속을 걷는다. 땅속을 걷다보면 태어날 자들과 죽은 자들의 이마에 손을 얹고, 내년에 피고 질 꽃들을 미리 꺾을 수 있을까.

- 「새들의 직업」 부분

국어사전을 펼쳐보면 동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손아랫사람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진다. 그것을 굳이 ‘同生’이라고 병기한 것은 시인이 그림자가 된 동생을 자신과 ‘동일한 생’으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나의 동생, 나의 그림자는 “나를 허공에 질질 끌며 땅속을 걷는다”. 여기서부터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주도권을 오랫동안 점해왔던 ‘형’과 늘 끌려다니기만 했던 동생’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중략) 우리는 이제 어느 곳으로든 날아갈 수 있었지만 그곳은 항상 그림자라는 검은 새장 안이었다. (중략) 각자의 검은 우리 속에 갇힌, 기후가 다른 고향을 가진 짐승들처럼,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뒤섞이며 오직 배회하는 것에만 목숨 걸고 있었다.

- 「황색 날개를 달고 우리는」 부분


시 안에서 ‘우리’는 새가 되어 버젓이 날개까지 달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림자라는 ‘우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각자의 검은 우리 속에 갇혀 있는 한 타인과의 소통이란 허상의 풍경이고 꿈같은 소리다.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나’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시인은 그림자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본다. 기존하는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무엇일까.

2. 눈물 한 방울 같은, 그늘진 심장

 

자전의 원심력을 견디기 위해 새는 제 그림자인 고양이를 검은 추처럼 지상에 던져놓고, 고양이는 검은 연처럼 새를 하늘 멀리 띄워놓는다.

허공이 온통 팽팽하다


- 「고양이는 새의 그림자 - 새라는 심장」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은 고양이가 “탁란된 제 심장을 꺼내 물끄러미 들여다본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탁란이 행해진 둥지는 바로 “심장의 주인”인 동시에 그림자의 주인인 ‘나’임에 틀림없다. 시인은 ‘새’로 표현된 ‘심장’이 본디 ‘그림자’인 ‘고양이’의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둘 사이에 있어야 할 화자 ‘나’는 정작 시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때문에 ‘고양이라는 그림자’와 ‘새라는 심장’ 사이에는 팽팽한 허공이 놓일 따름이고, 이는 시집 전체를 가로지르는 긴장감의 주요 성분으로 작용한다. 이 복잡한 균형과 순환(「완벽한 원」), 그리고 그림자와 심장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자전의 원심력”, 즉 시간의 흐름이다.

그림자는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진 내장기관. 그것은 몸의 모든 혈관들의 집결지. 늘 우울한 심장의 은신처. 육체에 전력을 공급하는 태양열 발전기. 긴 그림자를 덮고 잠들었던 심장이 깨어나는 시간, 늘 그는 침착하게 그림자 속으로 메스를 쑤셔넣는다.

- 「외과의사 늘의 긴 그림자」 부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늘’ 그가 잠든 사이 몰래 감아놓는 그림자는 그를 “태엽인형처럼 째깍째깍 수술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동력원이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 아래에서 그림자와 심장의 의미상 경계는 흐릿해지며 나와 그림자는 하나의 심장 위에서 서로 겹쳐지게 된다. 그러니 ‘잠든 심장’이 그림자 안에 은신해있는 상황이 혼란스럽기는 해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다. 이 혼란은 “자전의 원심력”을 다르게 받는 나와 나의 그림자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물리적, 정서적 틈에서 야기된 것일 터이다. 짧아진 그림자를 ‘감아놓았다’고 말하는 낮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이야기”(「침대 이야기」)가 끝나는 시간, 태엽 같은 그림자가 비로소 ‘풀어지는’ 시간인 밤에 이르게 된다.

3. 몽유와 불면이 잠든 밤

늘 그는 우주에서

그림자란 꼬리가 가장 길고 깊고 변화무쌍했던 생명체

늘…… 우리들의 그 늘…… 밤에 과연 자유일까


- 「외과의사 늘의 긴 그림자」 부분

어둠이 찾아오면 사라지는 그림자는 밤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늘 밤엔 재밌는 일도 많은데”, 이것이 궁금한 시인은 허공을 뚫고 “적요한 불면의 눈을 향해 줄곧 달리는 중이다”(「내 꿈은 불면이 휩쓸고 간 폐허」). 그는 “오늘도 불면증과 몽유병은 집안에 따뜻하게 잠들어 있”(「까만 편지지 하안 연필」)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이 직접 불면과 몽유의 자리를 떠돈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서 거의 모든 사건은 밤이라는 배경에서 발생한다. 꿈의 꼬리를 요구하는 ‘역사’의 이야기가 그렇고 잠든 자작나무에게 사과하는 ‘엽사’의 이야기가 그렇다. 용산이라는 공간으로 압축될 수 있을 ‘서울 2009’ 연작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다시 이 사건들의 배후이자 주체는 “내 다음 생의 텅 빈 객석에 홀로 앉아 / 내 이번 생의 뒤통수를 관람하는”(「초의 시간」) 그림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밤은 우리가 사라진 그림자를 찾아다니는 시간이 아니라 ‘풀려난’ 그림자가 우리를 떼어놓는 시간인 것이다.

눈빛보다 빠른 주먹. 근사하지. 그것은 절대 헛것이 아니다. 저만큼 나가떨어져 넉다운된 챔피언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와 나의 관계는 비밀이 아니다. 불문율이다.

링 위에서 나는 챔피언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그의 나쁜 소문에도 관심 없다. 그를 쓰러뜨리고 나서도 비웃거나 모욕하지 않는다. 그는 나의 분신이니까. 다만 나의 고독이 커질수록 나의 그것은 알약처럼 작아진다. 덕분에 내게 있어 나의 존재는 견딜 만한 통증이다.

- 「무적의 스파링 파트너」 부분


그럼에도 나와 나의 그림자는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 화자는 “벌벌 떨며 나는 내 그림자가 잠든 관을 쪼개 벽난로 속에 던져넣었”(「침대 이야기」)다면서도 “나는 잠들기 전, 내일도 챔피언을 때려눕힘으로써 그를 영원히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무적의 스파링 파트너」)고 말한다. 이렇듯 화해 없이 연속되는 애증의 관계는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는 자정을 기해 달 주위를 돌기로 결정된 지구(「사구의 달이 자라는 겨를」)에 사는 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인 듯 보인다. 이때 나와 나의 그림자는, 서로의 존재를 두고 “덕분에 내게 있어 나의 존재는 견딜 만한 통증”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다시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이야기의 가장 기이한 점은 책 안에 있지 않다. 작가인 샤미소가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작중 인물인 슐레밀이 작품 밖으로 나온 이상 말이다. 슐레밀의 이름으로 놀림을 받는 샤미소라니, 슐레밀은 그 자신이 샤미소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림자들의 이야기를 허구의 범주 속에만 가두어 둘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샤미소는 훗날 자신의 그림자와 운명론 밑에서 화해하고, 시인은 자신의 그림자와 여전히 서로의 등을 맞대고 도돌이표처럼 달라붙어 있다(「새벽의 후렴」).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의 그림자들, 너무 익숙하거나 너무 낯설어 마주하기 쉽지 않은 그 대상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림자라는 비유의 가장 단순한 측면으로 되돌아가 본다면, 재미있게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오석화 (전기·정보공학부·10) / 총문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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