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재] 네덜란드 채소 종자 산업

샐러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프리카. 현재 파프리카 종자 한 알의 가격은 5백 원에서 천 원 정도로 1g에 6만~12만 원이다. 같은 무게의 금과 비교하면 두세 배나 비싸다. 이처럼 파프리카 종자가 비싼 이유는 품종보호제도에 따라 종자 로열티를 해당 국가와 기업에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파프리카 종자를 주로 수입해 오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종자 산업의 강국 네덜란드이다.

채소 종자 시장을 선점하라

종자 산업은 농산물의 종자를 개발하고 생산해 이를 가공하고 재배농가에 보급하기까지 전 과정을 아우른다. 같은 배추라도 어떤 품종의 종자냐에 따라 그 작물의 생장 속도,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수한 품종의 종자를 개발하는 종자 산업은 농산품 산업의 바탕이 된다. 또 식량자원 확보와 기후변화 대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강병철 교수(식물생산과학부)는 “좋은 품종의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재배 기술 개발을 비롯해 여러 방법이 있지만 이에는 한계가 있다”며 “종자 개발은 모든 농작물의 생산을 뒷받침하는 핵심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종자 시장의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12년 기준 세계 종자 시장의 규모는 약 450억 달러로 지난 10년간 2배가량 성장했으며 세계 종자 교역액은 1990년 30억 달러에서 2012년 203억 달러로 약 7배나 증가했다. 현재 세계 종자 시장에서 채소 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7% 정도로, 곡물 종자가 약 70%인 데 비해 크지 않지만 국내 종자 시장에서 채소 종자 산업은 다른 종자 산업보다 더욱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강 교수는 “세계적인 종자 기업인 몬산토, 듀폰 등의 기업은 주로 식량 작물을 다루고 있어 지역적 특성이 강한 채소 작물은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며 “때문에 채소 종자 시장은 규모가 작은 국내 종자 기업이 파고들 수 있는 틈새시장”이라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 국내 채소 종자 산업은 국내 전체 종자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4%로 비교적 크다. 채소 종자의 수출도 1990년 600만 달러, 2010년 1,800만 달러, 2013년 4,100만 달러로 매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채소 종자 기업은 영세한 수준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국내 4대 종자 기업이었던 흥농, 중앙, 서울, 청원종묘가 외국 기업에 인수돼 수많은 국내산 종자와 핵심 기술들이 외국 기업으로 이전됐고 이후 종자 산업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외 채소 종자 의존도가 높고 해외 종자 기업에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현재 파프리카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토마토와 양파의 자급률 역시 10~15%로 낮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외국에 지급한 로열티는 약 176억 원이며 2020년 지급해야 할 금액은 7,9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12년부터 국내산 종자를 개발해 수입을 대체하고 해외에 수출하기 위해 골든 시드 프로젝트사업을 시행 중이다.

네덜란드의 연구 중심 종자 산업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인 네덜란드의 종자 산업은 1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세계 채소 종자 유통량 중 네덜란드산은 35%에 달한다. 골든 시드 프로젝트사업을 성공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본보기로 네덜란드의 종자 기업을 방문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을 드 리르(De Lier)에 위치한 라익 즈완(Rijk Zwaan)은 채소 종자 산업 분야에서 세계 5위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 종자 기업이다. 연간 매출이 약 3천5백억 원으로 국내 1위 종자 기업인 농우바이오(현 농협으로 인수)의 매출액이 약 560억 원인 것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다. 또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는 파프리카 품종의 70%를 선점하고 있을 만큼 국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남쪽에 라익 즈완이 있다면 북쪽에는 엔자 자덴(Enza Zaden)이 있다. 네덜란드의 작은 항구 마을 엔크하위젠(Enkhuizen)에 위치한 엔자 자덴은 1938년 작은 채소 종자 판매 회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세계 10대 채소 종자 기업 안에 드는 큰 육종회사이다. 라익 즈완처럼 수많은 지사와 재배 시설들을 세계 각지에 보유하고 있으며 토마토, 파프리카, 오이, 상추, 멜론, 양파 등 채소 작물을 중심으로 연구 및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 엔자 자덴의 종자 처리 시설
농가에서 생산된 종자는 엔자 자덴의 본사로 모여 세척·포장을 거친 뒤 세계 각지로 수출된다. 대부분의 작업이 자동화돼있어 종자 처리 작업은 총 25명의 직원만으로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네덜란드의 종자 사업은 연구 부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매출액의 15~25%를 연구 분야에 재투자하는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유럽연합(EU) 종자 산업 평균인 12.5%에 비해 높다. 이 중 85%를 신품종 개발에 나머지 15%는 육종기술 개발에 지출하고 있다.

이런 투자 방식 때문인지 장비의 수준도 국내 종자 기업의 수준을 크게 웃돈다. 품종 개발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작물의 DNA를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라익 즈완의 분자생물학팀에서는 매달 수백만 점의 DNA를 고가의 장비로 분석하고 있다. 라익 즈완 분자생물학팀 아트 보겔라르 박사는 “일주일에 거의 십만 개의 DNA 추출이 가능하며 PCR* 장비 3대를 이용해 일 년에 5천만여 점의 표본들을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종자 기업의 부서는 종자 연구·개발, 종자 생산, 판매 등으로 조직돼 있는데 연구·개발 부서가 무척 세분화돼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라익 즈완의 연구·개발 부서는 종자 기술팀, 세포 생물학팀, 병리학팀 등으로 구성돼있으며 각 팀은 기술개발팀과 기술응용팀으로 또다시 나뉜다. 엔자 자덴도 연구·개발부서를 육종팀과 생명공학팀으로 나누고 토마토, 파프리카, 오이 등 각 작물별로 개발팀과 병리 검정팀을 두고 있다. 이처럼 세분화된 부서는 연구원들이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 국내 육종가나 연구진들이 직접 작물을 재배하면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과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재배 업무와 연구 업무가 분리돼 있다. 재배자가 식물체 재배와 교배, 식물체 관리를 담당하고 현장 기술자가 파종과 정식 관리 등을 담당하고 있다. 육종가가 품종 선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육종가들이 원하는 식물 자원을 선발할 수 있도록 유전자원을 개발하는 선(先)육종가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 육종가들은 재배자·현장 기술자와의 끊임없는 의사소통을 통해 우수한 품종 개발을 위해 힘쓰고 있다. 품종 선발에 있어 서로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엔자 자덴의 육종팀 와우터 린드만 박사는 “품종을 선발할 때 재배자들의 이야기를 항상 먼저 들으려 한다”며 “재배자가 직접 키우면서 얻게 되는 지식이 품종 선발의 열쇠가 된다”고 밝혔다. 

▲ 라익 즈완의 재배자 재배자가 온실 안에서 광량을 조절하기 위한 차광막을 치고 있다. 이들은 육종가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우수한 품종 개발에 힘쓰고 있다.


한편 데모 필드(Demo Fields)를 마련하는 소비자 위주의 사업도 돋보인다. 데모 필드는 농민이 종자를 구매하기 전에 그 품종의 특성이나 상태를 미리 관찰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신품종을 적절히 도입할 수 있도록 구성된 곳이다. 실제로 농부들이 데모 필드에서 상추를 비롯한 엽채류의 상태를 살펴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날 라익 즈완을 방문한 농부 로빈 씨는 “데모 필드에서 품종의 생장 상태를 확인하고 종자를 구매하니 사진이나 종자만을 확인하고 사는 것보다 신품종 도입에 대한 걱정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 라익 즈완의 데모 필드
데모 필드에서 농민들이 농작물을 관찰하고 있다. 라익 즈완에서는 노지에서 자라는 작물뿐 아니라 수경재배하는 작물도 시범적으로 보이고 있다.


산학연의 협력체계가 잘 갖춰진 것도 네덜란드의 강점이다. 와게닝겐에 위치한 와게닝겐 UR이 바로 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와게닝겐 UR은 네덜란드 국립 연구기관인 DLO와 와게닝겐 국립대가 통합되면서 설립된 복합시설이다. 대학에서는 기초 과학 연구를, 국가 연구기관에서는 대학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를 상용화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또 기업 간에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라익 즈완의 보겔라르 박사는 “현재 육종기술개발회사인 키진(Keygene)과 토마토 연구를 진행 중이며 엔자 자덴과도 공동 연구를 진행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 종자 검역소인 NAK과 원예작물 검역소인 낙튄보우(Naktuinbouw)를 통해 기업이 개발한 종자가 실제 신품종인지 판별하고 수출하는 종자의 안정성도 함께 검정하는 과정도 필수적으로 거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종자산업법에 따라 농림부와 국립 종자관리소에서 품종생산판매신고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제도가 악용되거나 불법으로 종자를 판매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우리나라 종자 산업의 해답은

이렇듯 네덜란드의 사례를 비춰볼 때 가장 시급한 것은 연구 환경의 조성을 통한 연구 인력의 확충이다. 농림축산식품부 이상준 사무관은 “현재 1세대 교배육종가가 은퇴하고 차세대 육종인력의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앞으로 충분한 육종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종자 산업 성장의 관건”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업연구센터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대 채소육종연구센터를 설립해 채소 육종에 특화된 석·박사급 전문 육종인력을 양성 중이다. 또 연구 환경 수준을 높이기 위해 김제에 민간육종연구단지를 세우기로 기획하고 2017년 완공을 앞두고 있다.

종자 기업의 품종보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농민들이 신품종을 부담 없이 도입할 수 있는 시스템도 요구된다. 강 교수는 “아직 우리나라는 같은 품종이 다른 회사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판매되거나 한 회사가 다른 회사의 유전자원을 몰래 가져와 파는 등 품종생산판매신고제도가 악용되거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이는 한국 종자 시장의 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사무관은 “농민이 좋은 품종을 스스로 선택해 재배하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2017년 민간육종연구단지 내에 우수 품종 시범 농장을 조성할 계획이다”며 “이곳에서 모든 품종을 한 곳에서 비교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PCR: 중합효소 연쇄 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검출을 원하는 특정 표적 유전물질을 증폭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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