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현 박사과정
노어노문학과

러시아에서는 공공기관을 들어갈 때, 심지어 기숙사에 들어갈 때도 까다로운 통행증 검사를 받아야 한다. 특히 동양인의 경우, 왜 도장이 사진을 조금 벗어났냐며 경비원이 시비를 걸기도 한다. 통행증의 문제는 소련의 유구한 전통이다. 소설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에세이 「안전통행증」(1931)에서 미지의 죽음을 당한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를 기린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경이롭고 위험한 시대를 마야코프스키가 어떻게 관통했는지 성찰한다. 그러나 마야코프스키는 새로운 세계를 안전하게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소비에트 여권에 대한 시」(1929)에서 “늑대가 되어 / 관료주의를 물어 뜯겠다”며 소비에트 인민의 당연한 권리를 노래했다. 마야코프스키는 무엇에든 굴복하지 않는, 뚫고 나가는 세찬 통행의 힘을 예찬했고, 파스테르나크는 그 통행의 위력이 결코 개인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점을 서글퍼한 셈이다.

그런데 통행이란 무엇일까? 그냥 지나가면 되는 것인데 왜 통행증이란 것이 있어 자격미달인 자를 거르는 것일까? 그 자격의 조건은 누가 세우고 따지는 것일까? 어느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 바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동요에도 나오는 이 질문은 어떤 일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 ‘세월호’라는 배도 “이 배는 어떤 배입니까?”라는 질문에 옳은 답을 갖지 못한 채 거센 바다를 지나느라 흐르는 세월처럼 사라져 버렸다. 꽃다운 생명들은 넓은 세계, 높은 꿈으로 향하는 길로 넘어갈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일상의 확실성과 안전을 위한 이 질문은 조심스럽게 제기돼야 한다. 무엇의 정체가 어떤지를 꼼꼼히 따지고 그 활동의 결과가 무엇일지를 살펴보기 위해 이뤄져야 한다. 단순히 그것은 어떻다는 가정을 두고 그것의 자격을 일방적으로 재단해 버린다면 “세월호는 배이니 바다를 지나도 좋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사람이 탈 만한 것인지 그 구체적인 사항들을 확인하는 것이 안전한 통행을 위한 정당한 검사다.

그런 합리적인 안전통행증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며 정중하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검문은 ‘공손한 무시’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누구냐를 묻기 전에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등을 듣고 정체성을 맞춰 보는 것이 조금 더 살갑고 성실한 태도다.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성급하게 물어보시면 당황스러워 입이 굳을 뿐이다.

성미 급한 사람들은 항상 간결하게 말한다. “그것은 제가 결단할 사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은 누구십니까?”와 같은 방식의 발화다. 항상 부유하고 있는 나는 이런 단호한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

국가안전처, 아니 국민안전처가 신설된다고 한다. 누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무엇을 정말로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는데 저 새로운 부처에 국민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안전처’라는 말만 남을 텐데 이곳에서 발급하는 안전통행증에도 도장이 어떤 색깔인지, 출신은 어디인지 등등이 문제 될 것 같다. 마야코프스키가 정말로 증오했던 그런 문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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