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단-한 등불 아래 김광균과 마주앉아
차단-한 등불 아래 김광균과 마주앉아
  • 김지윤 기자
  • 승인 2014.10.05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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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광균 탄생 100주년

 시 속에서 회화적 이미지를 형성하며 현대 한국 모더니즘의 초석을 다졌던 우두(雨杜) 김광균.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 5월에는 시인의 모든 원본 시편과 소설과 평론, 수필 등 산문 85편이 『김광균 문학전집』에 한데 담겼으며 시인에 대한 학술논문 발표와 기념문학제 등을 통해 그의 삶을 되새기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이 작업에 따라 100년 전에 탄생한 한 시인의 작품세계가 회화성이라는 한 단어로 포괄할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이 드러나고 있다.

▲ 삽화: 최상희 기자 eehgnas@snu.kr

화면을 구현하는 언어와 '무시학의 시대'

1919년 3.1 운동의 실패로 인한 충격의 여파는 문학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시인들은 1920년대 허무적 낭만주의를 표방하며 좌절과 비애, 상실감을 다루는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하지만 만주사변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가 이뤄지면서 감상적 낭만주의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요구가 문학계에서도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 때 1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관습, 형식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이를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서구의 모더니즘이 한국 문학계에 유입됐다. 이에 기존 사조의 한계와 그에 대한 회의감에서 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은 기존의 지나친 감상주의로부터 의도적으로 탈피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김광균은 김기림,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활동하며 30년대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했다.

모더니즘엔 넓게는 전위적, 실험적 작품 활동을 하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사조부터 이성적 표현주의의 명맥을 잇는 주지주의, 이미지즘 등이 포괄된다. 특히 우리나라 문학계에 주로 자리 잡았던 영미 계열의 모더니즘은 언어의 기술적 조탁과 단단한 형식, 지성에 의한 감정의 통제 등 지적인 기술주의를 추구했다. 모더니즘의 대표 시인인 김기림은 “모더니즘에 센티멘탈(서정)이 있으면 안 되고 내용에 편중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모더니즘 시는 사상이 아닌 언어 자체로 쓰이며 시의 형식을 기술적으로 조탁하는 작업을 강조했다.

김광균은 모더니즘 중에서도 이미지를 사상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이미지 묘사 자체에 골몰하는 이미지즘을 받아들여 회화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그는 마치 영화감독이 화면의 모든 구성요소인 미쟝센을 연출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듯 작품의 모든 구성요소와 그들의 배치를 꼼꼼하게 신경 쓰며 시로써 화면을 그려내는 연출가였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시각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설야」는 그가 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 스크린에 나온 눈이 유난히 아름다워 그 때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외인촌」의 한 구절에 등장하는 ‘성교당의 지붕’도 쥘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하얀 처녀지」(1934)에 나온 도시 속 가톨릭교회 첨탑의 이미지에 착안하여 구체적인 화면을 활자로 구현했다.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설야」)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외인촌」)

김광균은 시각적인 묘사에 청각을 배합한 공감각적 심상을 통해 역동적인 이미지를 빚어내기도 했다. 김기림은 그의 시를 평하며 “그는 소리조차도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지즘은 프롤레타리아 계열로부터 ‘형태에만 지나치게 치우쳐져 내용면에서 무의미한 문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모더니즘 문학가들은 이에 내용과 주제만큼이나 형태도 작품 속에서 의의를 가지며 동등한 차원에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입증해 반박할 필요가 있었다. 김광균은 시에서 형태가 형식 이상의 역할을 가지며 기존의 신념, 사상이 가지는 것과 동일하게 독립적인 위치를 가진다는 주장을 통해 모더니즘 문학에 힘을 싣고자 했다.

그는 「나의 시론-서정시의 문제」라는 글에서 ‘형태의 사상성’이란 개념을 처음 언급하며 시의 형태와 사상의 관계,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형태의 유의미함을 설명했다. 그는 “정신의 혁명은 거기에 적합한 생산 공정을 통해 반드시 형태의 혁명에 나타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정신의 혁명은 제일 먼저 시의 형식을 포함한 형태의 혁명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했다. 제작을 통해 만들어진 ‘생산 공정’이라는 형태에 따라 내용이 다르게 담기듯이 시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에 담길 사상에도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의 사상성’에서 그가 말하는 형태란 단순히 시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의식(意識)적으로 제작함으로써 사상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의식(儀式)’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광균이 형태에 치열하게 몰입하여 얻게 된 ‘사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상 없는 사상성’이다. 그의 작품에서 세태에 대한 시선은 깊이 없이 사물의 표면에 머무르게 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이 유보된 사상은 감각의 범주에 머무르는 ‘사상 없는 사상성’과 같았다. 활동 초기에 발표된 「창백한 구도」라는 시에선 ‘허무러진 시대’, ‘지나간 현실의 어두운 유산’ 등의 구절을 통해 시대적인 문제와 결부된 표현을 사용한 데 반해 이미지즘에 착안한 30년대 후반 작품에선 세태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됐다. 김광균은 사상이 부재한 모더니즘 문학을 두고 ‘무시학(無詩學)의 시대’라는 선언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했다.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일제 치하에서 제대로 시대를 이해하고 신념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며 지향할 만한 사상으로서의 시학을 논할 수 없는 와중에 믿을 수 있는 건 작품에 대한 기술적 접근뿐이었다. 형태에 천착하는 모더니즘의 속성은 서구와 같이 근대독립국가로 자리하지 못한, 사상조차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 필연적으로 사상이 아닌 형태로 눈을 돌려 시에게 숨 쉴 틈을 선사했다. ‘형태의 사상성’이라는 말을 통해 김광균은 형태가 사상의 변화를 담는다는 점에서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며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에서 시 속 이미지의 묘사가 시대에 대해 그나마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여겼다.

김광균 특유의 낭만적 이미지즘

독특한 점이 있다면, 김광균은 감각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를 추구하면서도 작가 고유의 서정성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모더니즘이 낭만주의를 지양하는 반작용에서 생긴 만큼 당시 모더니즘 문학계에서 김광균의 시에 나타난 낭만성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30년대 모더니즘 시인 정지용은 김광균의 시를 두고 ‘감정의 범람’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김유중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작가의 낭만적 이미지즘를 두고 “서구 이미지즘의 건조한 이미지가 거부했던 단순한 비애감과는 궤를 달리한다. 한국적 정서를 탁월하게 담았다”고 평가했다.

김광균은 개인적으로 주변인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얻은 상실감을 “죽은 누나의 하-얀 얼굴이 피어 있고”(「벽화」),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은수저」)와 같은 구절을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와사등」에선 ‘차단-한’이라는 김광균만의 조어를 통해 도회적 이미지와 도시인으로 살아가는 소외감을 절묘하게 교차하며 차가운, 혹은 차단(遮斷)한 표현에서 개인적 비애감을 드러냈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홀로 어디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와사등」)

기존에는 시인이 화려함 속의 우울한 심경을 감각적 이미지로 그려내기 위해 이 조어를 내놓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 ‘차단—한 등불’은 개인적 우울함을 넘어 식민지 시대의 상실감을 가리키는 ‘슬픈 신호’를 뜻한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개인적 차원의 서정성을 승화시키던 이미지는 시대의 아픔을 바라보는 우울함을 덧입게 됐다.

초기에 신경향파의 시를 써왔고 형태의 사상성을 일제 치하에서의 대안으로 삼았던 그였기에 세태를 꾸준히 인식하면서도 부당함에 자족할 수밖에 없다는 우울함이 김광균의 이미지 속에서 자연스레 담겼다고 볼 수 있다. 김학동 교수(서강대 국어국문학과)는 그의 우울한 모더니즘은 허무적인 낭만주의와는 다른 “당대 현실적 공감을 매개로 하는 다른 차원의 흐느낌”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제 서구 사회에 맞춰진 모더니즘에 표현의 기질과 시대의 슬픔을 한데 녹여내 적절히 변용하면서 ‘한국적 낭만의 모더니즘’을 실천하는 시인으로 평해진다.

김광균은 해방 직후 평론에서 모더니즘을 반성하는 글을 쓰면서 지속적인 고민과 실천을 이어갔다. 그는 모더니즘의 특성 때문에 시세계에서 유보돼왔던 사상, 의미에 대한 성찰적 시각을 선취함으로써 모더니스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즘을 두고 “도심지대에 서서 지나가는 바람에 구호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찬란하면서도 깊이를 포기했던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자성하며 그는 ‘오랫동안 맹목해온 백만 서울 인민의 생활’과 ‘사회성’을 논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해방으로 드디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방성이 주어졌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좌우의 이념대립이 깊어가며 좌파 계열인 조선문학가동맹(문맹)에선 오로지 시대정신을 반영한 계몽 운동으로서의 작품 활동을 지향했고 이와 반대로 청년문학가협회(청문협)에선 시대사상을 배제한 순수 작품을 추구하는, 소위 우파적 문학 활동을 펼쳤다.

겨레와 겨레의 싸움 속에
나는 이 시를 눈물로 쓴다.
…(중략)…

해방의 종소리는 허공에 사라진 채
영영 다시 오지 않는가
-(「삼일날이어! 가슴아프다」)

김광균은 문맹에 대해선 “정치의 진보가 문학의 진보일 수 없다”고 말하며 인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구호에 문학이 매몰돼 자신의 예술성을 잃어간다고 비판했고 청문협에 대해선 “시의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자기만족에 연연하면 시는 굶어 죽고 만다”고 지적하며 시대를 역행하는 순수시에의 집착을 비판했다. 광복 이후 갈라져버린 문단에서 김광균은 중도 노선을 취하고 한국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염려했다.

김광균은 작품에서부터 평론에 이르기까지 이미지를 묘사하는 형식과 시대 상황을 담은 내용 사이의 균형점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비록 양비론의 논지를 펴며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진 못했지만 혼탁한 시대 속에서 문학의 무게중심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인의 생애가 오늘날 작가와 독자들에게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지표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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