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에게서 받은 냉소와 조롱은 곧잘 내 삶의 의미를 무색하게 했고 사고의 힘찬 전진을 맥빠지게 했다. 내 존재를 붙들고있던 나만의 신념, 시각, 추억의 구석구석까지 모든 것은 한 충실한 배우가 연기한 알레고리의 연속이며 알레고리는 모방과 차용으로 얼룩져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폴 발레리의 글은 어떤 힘을 준다. 불순한 자기 존재의 그늘을 끊임없이 비춰 밝히려던 그. 밑도끝도없는 무한을 항시 직면하며 그가 발견한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학술부의 지면 운영은 부장의 이런 개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지적 탐구 과정이기도 하지만 넓게는 중단할 수 없는 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서부터 좁게는 배우고 사고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에까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번 학기 학술부의 첫 번째 구성은 불명확한 사고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고전이 말하는 평등’, ‘극우 세력들의 행동역학’ 등 개념의 맥락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신문이란 형식에 학술부 기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발레리의 ‘테스트 씨’에게 신문이란 무엇인가. 그 마음 속에서 “철학이 도무지 신용이 없고 언어가 노상 고발당하고 있는” 테스트 씨는 생각한다. 우리가 교감함으로써 존재를 확인하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이란 것이 실은 남의 생각을 통해 표현되고 있지 않은가. 또 유명한 생각이라 불리는 것들은 실은 유명해지기 위해 남에게 줄 효과를 배려한 것으로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려는 열정을 포기한 결과물이다, 그런 생각들이 구름처럼 군중들을 메운다. 시작(詩作)까지도 순수한 정신의 반영이 아닌 불명확한 것이라는 판단 하에 발레리는 ‘20년의 침묵’에 들어가고 테스트 씨는 정신활동의 법칙을 찾기 위해 추상적인 생활을 꾸려나간다.

테스트 씨의 방엔 한 권의 책도 없고 추상적인, “정리(定理)의 임의의 점과도 같은” 가구들과 ‘몇 장의 신문’이 있다. 그에게 신문은 인식의 원료 같은 것이다. 순도높은 사실과 사건들이 정신과 맺는 이합집산 과정을 관찰하며 그는 추상화된 숫자들을 내뱉고 그 숫자들의 낙차가 곧 그 자신이 체화된 하나의 시스템이 됐다. 학술부가 ‘평등’, ‘극우’라는 단어를 부연설명함으로써 도모한 것은 다른 신문 기사가 고착화된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해 원료 역할을 다해내지 못하는 것을 우려함이었다. 벼랑과 벼랑 사이 널빤지로 만든 다리를 빨리 뛰어가면 문제없지만 한 곳에 머무르면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고착화된 이음새들과 병렬작용하던 각각의 단어들에 무게를 주고 머무름으로써 그 단어는 무수한 맥락으로 풀어헤쳐지고 보다 명확해진다.

이번 학기 학술부의 두 번째 구성은 앞선 문제의식에서 나아간 것으로서 ‘인플레이션 이론’, ‘인(P)의 존재 규명’ 등 물질 세계의 작용을 좇아 들어간 것이었다. 창백한 방 안, 숫자들에 파묻힌 테스트 씨는 무한한 고독에 직면한다. 존재의 불명확한 부분을 남김없이 밝히려는 그는 오히려 존재를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원자들의 이합집산, 자신을 관찰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과정을 거치며 개성이나 견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또 테스트 씨는 밤마다 여전히 남아있는 자신의 그늘진 부분 때문에 괴로워한다. ‘잠’은 그 그늘이자 앎과 무지, 유한과 무한의 경계이다. “빈 소라고동에 바다의 중얼거림이 매달리듯/ … /내가 있는지, 있었는지, 잠자는지 아니면 깨어 있는지?”(「뚜렷한 불꽃이」)

잠은 알 수 없는, 그래서 고통스런 영역이지만 또 잠은 무한 속에서 갈피를 잃은 존재에게 지향과 의미, 존재의 활력을 만들어준다. 발레리는 그늘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 자체를 소재로 원래 떠나왔던 시작(詩作)과 미학의 세계로 돌아왔다. 또 방대한 우주와 신체의 세계 속에서 느낀 학술부장의 공허는 다시 나를 구체적 사변으로 회귀하게끔 한다. 사회 수준에서 확실히 존재하는, 인식을 옭아매고 사실을 왜곡하는 문제들을 해체하는 일, 사회 법칙들과 수시로 뒤섞이는 주체가 되는 작업에서 발레리가 발산했던 미학이 집단 수준에서 발현될 수 있을까.

처음 보는 개기 월식, 처음으로 드러난 지구의 그림자에 나는 흠칫 놀란다. 지워져가는 아름다운 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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