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캘리그래퍼 강병인

어젯밤 마신 소주병의 라벨, 오늘 아침을 먹은 식당의 간판, 점심에 본 영화 제목에 이르기까지 각각에 쓰인 글씨가 진지한 궁서체나 딱딱한 돋움체가 아니라는 점을 눈치 챘다면 당신은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다. 길거리엔 단순히 프린트된 글씨가 아닌 각양각색의 손글씨가 각자를 뽐내고 있다. 이처럼 손으로 직접 써넣은 글씨 디자인 ‘캘리그래피(Caligraphy, 멋글씨)’는 어느샌가 우리의 삶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강병인 캘리그래퍼는 한글에 서예 디자인을 접목해 캘리그래피 대중화의 디딤돌을 쌓았다. 강 작가는 캘리그래피를 “표현하고자 하는 상업적 대상의 의미나 특징에 이야기를 담아 글씨로 살려내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글자 자체에 담긴 정보뿐 아니라 감성이나 철학 등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상호간 다정다감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게 캘리그라피의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술을 마신 듯 술술 통하라는 의미를 지닌 캘리그래피 연구소 ‘술통’에서 온갖 문방사우와 한글 조형물 속에 파묻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강병인 씨가 작업실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어 그는 "글씨에는 사람의 희노애락이 담겨있기 때문에 글씨를 쓰는 것은 사회를 담는 작업이다"고 글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진: 김희엽 기자 hyukmin@snu.kr

◇한글서예에 상업 디자인을 접목하다=초등학생 때 서예를 접한 ‘한글세대’ 강 작가는 자연스레 “한글서예로 이름을 남기겠다”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판본체나 궁서체와 같은 복고적인 한글서체만 있던 상황에서 한글서예를 배우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엔 한문서예가 인정받았다”며 “한글서예는 취미 활동이라는 인식이 공공연했다”고 말했다.


서체를 공부하며 강 작가는 힘 있고 다양한 꼴을 가진 추사체에서 착안해 한글의 힘, 멋, 조형성을 알릴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오늘은 비가 왔다’는 문장을 예로 들었다. “평범한 서체로 이 문장을 쓰면 그냥 비가 왔다는 뜻만 드러나지만 추사체로는 화가 나면 거칠게 우울하면 촉촉하게 써서 문장의 의도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90년대 초, 일본 여행에서 무수한 상업용 서예 디자인을 본 그는 한글에 상업적 디자인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을 가보니 술병이나 가게 이름처럼 상업적 글씨 디자인이 안 쓰이는 데가 없었다”며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비슷한 서예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캘리그래피를 여러 분야에 사용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작업실을 마련한 그는 표음문자인 한글의 ‘표의성’을 발굴하는 상업적 글씨 디자인, 즉 캘리그래피로의 모험을 시작한다. “‘꽃’이란 단어를 봐요. 초성은 잎, 중성은 가지, 종성은 뿌리 같죠?” 아직 돈을 내고 ‘글씨’를 써달라고 요청하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한글 캘리그래피가 어떤 효과가 있을지 전혀 확인되지 않았던 시기의 도전이었다. 이는 한글 캘리그래피의 시발점이 됐다.


◇하나의 글씨를 만들기까지=강병인 작가는 하나의 캘리그래피를 위해선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드라마 ‘정도전’을 작업한 경험을 설명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알던 정도전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정도전은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어요. 정말 대단한 사건이죠. 임금이나 지배 계층을 위한 게 아닌 민주적 국가를 그린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어 캘리그래피 소비자인 드라마 제작진이 정도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고려했다. 그는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소비자의 생각이 입체적으로 담긴 글씨를 써야 한다”며 “배우가 역할에 감정 이입을 하지 않으면 드라마가 재미없듯 제가 쓴 글씨를 보고 소비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줄거리, 제작 의도뿐만 아니라 이전에 강 작가가 정도전 역 조재현 배우와 만났던 경험까지 놓치지 않았다.


강 작가는 정도전이 올곧으면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이미지에 맞게 어떻게 글씨를 써야할지 고민했다. 올곧음을 표현하기 위해 직선적이고 장엄하고 끈기가 느껴지는 판본체를 쓰기로 했다. “획의 굵기를 일정하게 해 올곧음의 이미지를 강조했습니다. 또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인 삶을 드러내기 위해 흘리듯이, 하지만 연결되게 글씨를 썼습니다.” 비슷한 방법으로 수많은 시안을 보냈고 드라마 제작진이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그는 “결국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한가 봐요”라며 스스로 생각한 최고의 시안이 그들의 결정과 일치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대왕세종’, ‘엄마가 뿔났다’, ‘착한 남자’등 드라마나 영화 제목뿐 아니라 각종 소주 브랜드, 책 표지 등 무수히 많은 그의 작품들은 이런 과정을 거쳤다.


강 작가는 단순히 글씨를 그럴듯하게 쓴 것은 캘리그래피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캘리그래피로 쓰려는 대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쓰는 경우엔 독창성, 해학성, 조형성, 함축성 등 핵심적인 부분을 놓치며 심지어 가독성도 해칠 수 있다”며 주의를 요했다. 특히 최근 지자체나 정부 차원에서 캘리그래피를 남발하는 현상에 우려를 표했다.


◇한글에 담긴 철학을 풀어내다=“사실 우리의 입장에서 한글을 막연하게 아름다운 문자라고 말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병인 작가는 자국의 문자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글이 왜 아름다운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작가는 한글이 자연과 사람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기에 아름답다고 본다. 그는 액자에 걸어놓은 작품들을 가리키며 “순우리말 ‘나비’는 직선이라는 틀에 갇혀있지만 살짝 곡선으로 만들면 나비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고 ‘충무공’의 ‘ㅊ’모양에는 강인한 이순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며 “이처럼 글자 하나하나에는 소리가 녹아있고 소리에는 사람과 자연이 녹아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훈민정음해례본에 언급된 제자 원리를 들어 한글에는 자연의 이치가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가령 모음은 ‘ㅏ’를 뒤집고 돌려 ‘ㅓ’, ‘ㅗ’, ‘ㅜ’를 만들 수 있어 ‘순환’이라는 자연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고 자음은 모든 소리의 값을 담고 있으니 곧 작은 우주로 볼 수 있다”며 “모아쓰기는 입체성과 상형성은 물론 초성이 종성도 될 수 있다는 음양오행 사상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는 ‘한글 세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한글의 상형성을 보여주고자 전문 조각가에게 의뢰해 입체 조형물을 제작·설치하는 것이다. 그는 “한글은 한국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꽃처럼 피어있고 솟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또 그는 올해 한글날을 맞아 개관한 국립한글박물관 후원회의 이사를 맡아 아름다운 한글을 지켜나갈 계획이다.


강 작가는 마지막으로 “글자는 물과 공기와 같아서 가볍게 생각되곤 하지만 문화를 살찌우는 큰 그릇”이라며 “이를 아끼고 더 가꾸어나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임을 강조했다. “멋글씨’가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그가 앞으로 써내려갈 붓의 자취를 함께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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