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세계 곳곳 '극우' 세력들의 행동역학 ③우크라이나 자유당

2013년 가을 유로 마이단에서 친러 야누코비치 정권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우크라이나 사태는 10년 전 같은 장소에서 벌어졌던 “오렌지 혁명”의 단순한 재현처럼 보였다. 그러나 큰 물리적 충돌 없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이어졌던 오렌지 혁명과는 달리 2013년 가을에 재점화된 유로 마이단에서의 시위는 야누코비치 정권의 축출, 갑작스러운 러시아의 개입 및 크림반도 병합, 동부 우크라이나의 분리주의자들과의 준내전 발발로 이어지며 10년 전의 사건과는 전혀 다른 사태로 비화했던 바 있다. 그렇다면 2014년의 유로 마이단과 2004년의 유로 마이단 사이에서 확인되는 차이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2014년 키예프 거리에서 발생한 시민들의 시위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10년 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시위와 전혀 다른 전개과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일까? 2004년 오렌지 혁명 당시에는 친러 세력의 축출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던 러시아가 2014년에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크림 반도 합병과 같은 초강수를 두며 우크라이나 사태에 적극 개입하게 되었던 것일까?

2004년의 오렌지 ‘혁명’과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의 차이를 만든 요인 중 하나는 현재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내 극우 세력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극우 세력 또는 네오나치 집단의 대두는 우크라이나만의 현상이 아니라 인접국인 러시아와 폴란드는 물론이고 사실상 전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우크라이나 극우집단의 경우는 이 지역에 한때 뿌리내렸던 ‘토착 파시즘’의 역사 때문에 더욱 문제적이고 논란이 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토착 파시즘이라고? 그렇다. 비록 나치 독일이 남긴 너무나 압도적인 충격의 그늘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우크라이나, 특히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은 역사적으로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같은 ‘원조’를 제외하면 아마도 가장 역동적이었을 파시즘 운동이 자생적으로 태동하여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 속에 활동한 파시즘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파시즘 운동의 주역은 1929년에 처음 등장해 독일의 후견 하에 서부 우크라이나의 갈리시아 지방에서 활동한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조직,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Orhanizatsiia Ukrainskikh Natsionalistiv: 이하 ‘OUN’으로 약칭)”이었다. 이 조직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과 독일의 나치당을 모델로 결성되어 갈리시아 지방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바, OUN의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에 대한 나치 독일의 적극적 후견과 지원이 만든 결과물이기도 했다. 2차대전 전까지 폴란드의 영역이었던 갈리시아 지역에서 OUN이 주도한 반폴란드 무장 독립운동(암살, 폭탄 테러, 관공서 습격)은 폴란드를 약화시키려던 독일 측의 지속적인 재정 지원과 공작 속에서 전개됐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과의 협력은 2차대전 발발 후 밀월관계의 정점에 도달했다. 1941년 6월 독소전 발발 당시 OUN 소속 조직원들은 나치 침공군의 일원으로 나치 침공군의 향도 역할을 담당했던 바 있으며, 나치 점령하 우크라이나에서 OUN의 주도하에 조직된 우크라이나 민병대는 나치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 “총탄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특히 독소전 당시 우크라이나, 특히 서부 지역의 볼히니야는 무려 전체 유태인 중 98%가 몰살당하는 지옥도의 현장이 되는데, 이런 비극은 나치 점령군과 토착 파시즘 세력 간에 수행된 적극적인 협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홀로코스트에 참여한 우크라이나 보조경찰 부대는 또한 1942년 OUN의 주도하에 결성된 무장조직 “우크라이나 봉기군(UPA)”으로 재편성된 후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폴란드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인종청소 작전을 시행했던 바 있다. 이 작전의 결과 최소 6만 명에서 최대 15만 명으로 추산되는 서부 우크라이나 거주 폴란드인이 학살당했는데, 피해자의 절대 다수는 노약자와 부녀자로 구성된 민간인들이었다. 나치에 대한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의 짝사랑은 나치의 패배가 확실시 되던 전쟁 후반부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OUN과 현지 우니아트 교회의 후원하에 출범한 제14 무장(Waffen) SS 전투사단 “갈리시아”는 전원이 우크라이나인 자원병으로 구성되어 제3제국 최후의 그 날까지 히틀러와 나치즘을 위해 열정적으로 싸웠던 것이다.

▲ 히틀러의 사열을 받는 무장 친위대 전투사단 갈리시아의 우크라이나 장병들
▲ 2차대전 당시 OUN의 여성 조직원의 모습

OUN과 UPA의 무장 독립투쟁은 2차대전 종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대략 1950년대 초반까지 OUN 영향하의 반소비에트 파르티잔 반군이 새로운 후견세력의 지원 아래 계속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치 독일을 대신한 OUN의 새로운 후견자는 장차 예상되는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함에 있어 이른바 ‘철의 장막’ 내부에서 활동하던 UPA와 같은 토착 반소비에트 세력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영국과 미국이었다. 미국정부, 특히 CIA(당시에는 OSS)는 OUN 조직원들의(물론 파시즘 기반의) 확고부동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헌신, 이들의 군사적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들의 가치는 1949년 베를린 위기에서 그 진가를 발했다. 박두해 오는 것처럼 보이는 3차 세계대전 발발의 위기 속에서 UPA 전사들이 미국 측에 제공했던 우크라이나 지역 소련군 배치도 및 준비태세와 같은 양질의 군사정보는 베를린 위기 당시 미국 측으로 하여금 소련 측의 군사적 역량과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베를린 위기 해결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협력은 또한 유태인 및 폴란드인 대학살과 같은 전쟁범죄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던 다수의 OUN 지도자들이 소련의 처벌(더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추적조차도)을 피한 채 성공적으로 서방권으로 도피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스테판 반데라(OUN의 리더), 미콜라 레베드, 야로슬라브 스테치코와 같은 다수의 OUN 전범들은 전후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 망명자로서 정착하게 되는데, 곧 독일 시민, 미국 시민, 캐나다 시민이 될 이들의 현지에서의 위상은 전쟁범죄 혐의로 단죄되어야 할 파시스트 전범이 아니라 소련이라는 악과 투쟁하는 “자유의 전사(Freedom Fighter)”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북미 지역에 정착한 이들 ‘자유의 전사들’이 현지의 재외 우크라이나 공동체를 장악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공’과 ‘반소’를 기치로 냉전기 미국의 대소련 봉쇄정책 수립에 적극 관여했던 OUN 출신의 서부 우크라이나인 이민 다수는 특히 정계와 학계에 적극 진출하여 하버드대, 앨버타대, 토론토대 등에서 우크라이나 지역학계를 장악했으니, 특히 OUN 출신이 집중된 앨버타 대학에서는 포로살해 및 민간인 학살과 같은 전쟁범죄에 깊이 연루된 무장 SS 출신(위에서 언급한 제 14 무장 SS 전투사단 갈리시아)의 전 OUN 조직원(Peter Savarin)이 심지어 대학총장직을 역임하기까지 하는 기이한 사례까지 확인되고 있다.

▲ 스테판 반데라의 사진을 든 네오나치 시위대

이들 “자유의 전사”들이 망명지에서 고수해 온 OUN의 전통과 역사는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재수입되었다. 이들의 영향력은 2차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파시즘의 본거지로 종전 후 ‘소비에트화’에 수반된 나치 청산 과정에서 많은 처벌을 받아야 했던 갈리시아 지역에서 특히 강하며, 특히 2004년의 이른바 “오렌지 혁명”은 갈리시아 지역에 잠복해 있던 옛 파시즘의 기억과 전통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이름과 기치하에 다시 분출하게 되는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특히 갈리시아 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 전우크라이나 자유연합(Svoboda)은 OUN의 직계 후예임을 자임하는 바, 이들에게 OUN과 UPA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범죄 행위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의 자랑스러운 활동으로 기억되고, 여러 학살의 책임자, 예컨대 스테판 반데라 및 로만 슈헤비치(OUN의 군사조직 리더 및 UPA의 사령관)의 이름은 이들에게 우크라이나 독립투쟁사의 영광스러운 영웅에 다름아니며, 갈리시아 사단에서 히틀러를 위해 싸웠던 우크라이나인 나치 친위대원들은 공산주의의 침공에 맞써 싸운 우크라이나 민족의 수호성인에 다름 아니다. 2012년 갈리시아 지방 선거에서 OUN의 재림임을 자임하는 정당, 자유당이 거둔 승리는 “자유의 전사”들이 북미와 서유럽의 망명지에서 지켜온 파시즘의 기억과 전통이 서부 우크라이나의 본토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통해 다시 부활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본격화된 OUN식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곧 동부와 중부 지역 유권자로의 동진을 시작했고 곧 드네프르 강을 건넌 민족주의의 물결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유로 마이단, 즉 독립광장에 도달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4년 1월 1일 키예프 전역의 거리에서는 OUN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의 초상을 든 수만의 군중이 갈고리 십자가 표식(OUN식으로 변형된 하이켄크로이츠)의 깃발을 휘두르며 반데라와 슈헤비치의 이름을 연호하며 횃불 시위를 벌였다. EU가입 및 민주주의, 독재타도를 외치는 유로 마이단의 군중들이 나치식 경례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그리고 “영웅들에게 영광을”이란 OUN의 옛 구호를 외치는 기이한 광경이 목격되기 시작했고, 검정색과 빨간색으로 이뤄진 OUN의 이색 완장, 또는 (나치를 연상시키는) 갈고리 십자가 표식을 단 채 활동하는 (언론에는 이른바 ‘우파그룹’으로 알려진) 무장 자경그룹이 조직되어 민주혁명을 수호한다는 명목하에 광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때 ‘오렌지 혁명의 재림’으로 불리던 민중들의 평화적 시위는 이렇게 “사태”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구자정 교수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