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 법관양성소와 근대 한국
김효전 저
소명출판사ㅣ879쪽
6만 1천 원

서울대엔 근대법학교육백주년기념관(84동)이 있다. 이 이름이 지시하는 근대 법학교육의 근간은 1895년에 설립된 법관양성소다. 한국 법학의 효시를 마련한 법학양성소지만 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많지 않다. 이에 김효전 명예교수(동아대 법학과)는 자신이 법관양성소와 근대한국의 법학교육을 주제로 진행한 연구 내용을 『법관양성소와 근대한국』에 담아 출간했다.

근대적인 사법제도를 마련하고 사법관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법관양성소를 설치했다. 설립 초기의 입학생들은 주로 30세 전후의 늦은 나이에 입학했고 그중 유력한 가문 출신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저자는 갑오개혁으로 신분철폐가 이뤄져, 법관양성소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라 해석한다. 즉, 입학생들은 대개 문벌이 없던 중인·향리 등이 상당수였을 것이며 일반인들도 법학을 신분상승 내지는 관직 진출의 왕도로 여겼다는 것이다. 법관양성소가 법학교로 바뀐 1909년 4월 정원 100명인 법학교 예과에 지원한 인원은 700명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법학에 대한 인기는 찰나에 불과했다. 조선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며 재판소는 친일세력으로 가득찼고 조선의 법학교 졸업생은 임용에서 배제돼 각종 법학교의 학생들은 자퇴하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더구나 1909년 7월 조선의 사법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기유각서가 체결되며 ‘실천과학’인 법학이 ‘실천 불가능’하게 되자 조선 법학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한일합병 후인 1911년 법학교는 결국 폐지되고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로 조직을 변경한다. 총독부의 본래 의도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를 폐지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인의 반발이 두려워 법학교의 명맥만 유지시키고 교명에서 ‘법’을 지워 뭐를 가르치는 곳인지조차 모르게 작명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홍보는 물론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경성전수학교의 많은 일본인 교수들은 변호사 개업 등의 이유로 교편을 내려놓는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배는 ‘번역’을 매개체로 근대 법학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 저자는 이에 주목해 근대 번역사를 상세히 서술한다. 일례로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은 ‘만국공법’이란 국제법에 의해 체결됐으나 당시 국내에 번역된 국제법 서적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국내 정치의 문란은 ‘언어로 법이 서지 못한 탓’이라고 저자는 평한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학교제도가 발달하며 법학 번역서의 수요는 폭등했지만 한국은 일본, 중국과 달리 번역을 국책사업으로 인지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교과서의 번역은 국가의 지원 없이 민간에 의해 이뤄졌으며, 주로 일본 유학파가 자신이 공부하던 서적을 번역한 것이었다. 한국 근대 법학이 일본 서적을 토대로 자리 잡은 셈이다. 당시에도 이에 대한 비판은 거세어, 당시 판사 변영만은 “일본문을 통해 서양문학의 비밀을 탐색하려 한다. 당초부터 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라고 평했다. 한편 통감부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의 언어와 내용을 검열하는 식으로 법학교육에 관여했다.

경성전수학교가 제6회 졸업생을 낸 1922년 조선총독부는 경성전수학교를 계승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설치했다. 교명에서 ‘법’이 빠진 후 11년 만에 원상복구된 것이다. 저자는 이를 국내외에서 전개된 치열한 독립운동의 결과며, 직접적으로 1919년의 3·1 운동으로 형성된 식민지 관료들의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했다고 해석한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이 설립됨에 따라 관립 법학교육기관은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대 법학과의 이원적인 체제로 해방 전까지 운영됐다. 해방을 맞아 이 두 기관은 합병됐고 오늘의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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