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만든다면 얼마나 재밌을까…나.”
케이는 그 앙다문 입술과 함께 턱을 괴고 있었다. 완연히 흐리멍덩해진 시선은 테이블 어딘가를 이리저리 활보하고. 주황색 실내등은 케이의 눈동자에서 허우적허우적.
“우연을 만든다는 거, 재밌을 것 같단 말이지.”
나른한 케이의 목소리에 슬쩍 케이를 바라봤다. 따끈한 아메리카노 바다에는 뜨거운 연기가 나오고 있다. 그 속의 빨대는 유유자적. 공기 가득 커피향도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나는 빨대를 몇 번을 휘휘 젓다가, 이윽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그거…, 저번에 내가 했던 말이잖아.”
“맞아.”
“우연을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외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응.”
“그리고 그때는 별 반응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랬었지.”
“우연히 마법사와 조우할 수 있다고 외쳤을 때는 웃기까지 했었지 아마.”
“마법에 흥미 없거든.”
케이는 당돌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입에 문 커피를 오물오물 거렸다.
따뜻하네. 뜨겁지 않아.
“근데 지금은 왜 만들고 싶어진 건데?”
케이는 잠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어서 케이도 입을 오물오물 거린다.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데 마땅히 케이의 입은 따뜻해지지가 않는다.
“… 뭐랄까. 사랑이야.”
“사랑?”
“응, 사랑. 그것도, 운명적인 사랑.”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다가, 내가 말했다.
“뜬금없는 거 알지 케이?”
케이는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그런가?”
하고 잠시 침묵.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들이켰다. 따뜻하기만 하고, 쓰다. 아주 썼다. 인상을 찡그리다 문득 보니 케이가 손가락을 까닥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케이가 말한 사랑이라는 것도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봐.”
“케이. 또 뭐하려고.”
“아냐. 그냥 물어보는 거야.”
“흐으음.”
“정말이라니까.”
“정말?”
“응 정말.”
“그래 그럼. 말해봐.”
“좋아. 그럼 질문 하나 해볼게. 네가 우연을 하나 만들었어. 그럼 그건 우연일까?”
“뭐야. 대답해야 하는 거야? 귀찮은데.”
“그래도 해봐. 심심하잖아. 만든 우연은 우연일까?”
“으음……, 애매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연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우발적인 사건을 보고 우연이라고 하지, 아마. 그럼 아닌 게 아닐까? 만든 우연은 만든 거니까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지? 그렇다면 내 대답은 만든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로 하겠어.”
“역시.” 하고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다르게 볼 수도 있더라.”
“그럼 틀렸단 말이야?”
“아니지. 그냥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 어떻게?”
“만약 우리가 누군가와 만나는 우연을 만들어 봤다고 해봐.”
“응.”
“정말 아무나 뽑아서 너를 누구와 만나게 하는 거야.”
“응.”
“그럼 우리가 만든 우연은 단순히 만남, 이것 하나잖아. 조우하는 누군가 까지 만들어 내는 건 아니지.”
“그렇지.”
“근데 우리가 만든 우연 덕분에 누군가를 만났고, 그 사람과 웃고 떠들면서 이야기를 조금 해보니 그 사람은 ‘우연히’ 마법사인거야. 그럼 뭐지? 누굴 만나는 것은 우연이 더이상 아니었지만, 누구와 만나는 지에는 우연적 요소가 여전히 있는 거잖아.”
“그런가, 흠.”
“그래서 생각해봤어. 이 경우 조우하는 누군가의 존재 자체는, 어쩔 수 없다고. 그래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거야. ‘만든 우연에도, 언제든지 우연은 있을 수 있다’라는 결론. 만든 우연은 연약해, 그리고 빈약해. 우리는 모든 우연적 요소를 통제할 수 없어.”
“흐음.”
케이는 시계를 본다. 그렇지만 역시 신나서 계속 말한다.
“자아, 근데 또 이런 거야. 나야 물론 마법에 흥미 없지만, 너는 좀 달라.”
“응. 그렇지. 근데 정말 마법에 관심 없나보구나. 아까부터 강조하는데.”
“당연하지. 으으, 내가 롤링한테 낚인 걸 생각하면……. 잠깐 그게 아니잖아. 자아, 아무튼 원래대로 돌아가서. 이런 거야, 만든 우연으로 우연히 만난 마법사와 이야기를 하고 보니까, 마법사는 우연히 여성이고, 그녀는 정말 우연하게도 네가 좋아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고, 우연히 너만큼 지적이고, 또 우연히 너보다 현명하며, 마지막으로 우연히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야. 역시, 만든 우연에도 언제든지 우연적 요소는 있었던 거지. 그런데 또 이런 느낌은 이야기를 계속 할수록 행복감으로 몰려와. 그래서 너는 자연스럽게 마법사에게 호감을 갖고, 나중에는 사랑에 빠졌어!”
“재밌어 지는데.”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응. 정말 모르겠어.”
“생각해봐.”
“흐음. 어떻게 될까? 가문의 반대에 부딪혀 험난한 모험의 길로 빠지려나? 아아, 그럼 가만히 있는 포터의 뺨을 휘갈길 정도의 감동과 재미가 가득한 본격마법대서사시?”
“절대 아니야. 사랑은 운명이긴 하지만, 운명에 도달하는 데는 단 하나의 우연이 좌우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는 거지. 만약 마법사와 만나지 못했어봐. 그럼 사랑에 빠질 일도 없는 거잖아? 우리가 누군가와 조우하는 우연을 만든 덕분에, 넌 운명에 낙찰 된 거야.”
“뭐야, 케이.”
나는 맥이 풀려 말했다.
“좀 더 극적인 전개는 없어? 갑작스런 결론은 시시하잖아.”
내 말에, 케이는 이제 여느 때와는 달리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리고 케이는 살짝 시계를 본다.
“이게 운명적인 사랑을 위해 ‘좋은 우연’이 필요한 이유야. 그리고 방금 든 예시의 좋은 우연은, 누군가와 만난다는 것. 일 테고.”
“좋은 우연이라….”
“난 이런 ‘좋은 우연’을 만들고 싶은 거야.”
알 것 같은 미묘한 뉘앙스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케이는 심히 엉뚱한 것 같다. 다시 커피잔을 바라봤다. 케이가 가장 좋아하는 모카 라떼 거품이 그의 앞에서 빙빙 돌고 있다.
이상한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조금 복잡한데, 케이.”
“그런가? 그럼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메리카노가 들어있던 잔속에서는, 후루룩후루룩 빨대 소리만 났다. 케이는 진지한 표정이다. 그리고 케이는 당돌했다. 나는 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것보다는, 슬슬 일어날 때도 된 듯 같은데 말야.” 케이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까?”
“응. 나가서 할 건 없지만, 나가보자.”
“뭐야, 케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네가 불러서 나왔는데 할 게 없다니. 책임감 없는걸.”
“미안 미안. 어쩌다 그렇게 돼버렸네.”
케이는 어느새 모카 라떼 한잔을 원 샷.
“정말 아무 생각도 안하고 부른 거야?”
“응.”
“나빴네.”
“집에만 있었을 거, 나오면 좋지 않았을까?”
“맞긴 한데 케이. 너무 대책 없는 건 좋아하지 않는걸.”
“대책은 금방 생길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자아, 그럼 여기서 계속 있긴 그렇고, 일단은 나가볼까?”
“그러자. 일어나는 걸로 해.”
케이가 또 살짝 시계를 본다. 아까부터 케이가 시계를 힐끗힐끗 바라봐서인지 괜히 지금이 몇 시인지 궁금해진다. 4시 55분. 그리고 케이는 주변을 한번 유심히 둘러보더니 어딘가로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돌아가는 것 같은데.
정신없이 케이를 따라가며 카운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내게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 아니 정확히는 누나. 누나는 막 커피 가게에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누나는 그랬다. 얼마 전에 케이와 내가 듣는 수업을 우연히 같이 들었고, 우연히 같은 조가 되어, 이야기 하다 보니 우연히 취미도 같았고, 또 우연히 성격도 맞는데다, 심지어 우연히 좋아하는 것도 같았는데.
여기서 또 ‘우연히’ 보게 되다니.
시간은 정지 되고.
“아, 그때 그 누나다. 네가 연락하지 못해서 아쉬워했던 그 누나.”
케이가 말했다. 어느새 케이는 웃으며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
“알바 시간 인가봐.”
나는 멍한 표정 가득.
“그렇네. 카운터 안으로 가고 있어.”
케이가 말했다.
“….”
“알바 시작하려고 옷 갈아입으러 가는 걸걸.”
“아.”
“….”
“케이…, 있잖아….”
“응?”
“나, 말 걸어야 하는 걸까?”
케이는 뭐가 좋은지 킥킥 웃기 시작했다. 케이는 정말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그리고 해맑게 덧붙였다.
“좋은 우연이잖아.”

▲ 삽화: 최상희 기자 eehgna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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