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은 박사과정
협동과정 미술경영

펠트천을 뒤집어쓴 채 야생 코요테와 한방에서 지내고 주술사처럼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목에는 악기 트라이앵글을 매고 때로는 그것을 치기도 하는 한 남자가 있다. 이 장면은 몇 해 전 개봉했던 영화 ‘늑대소년’의 한 장면이 아니다. 독일의 전위적인 예술가인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가 1974년 뉴욕시의 르네 블록 갤러리(Rene Block Gallery)에서 3일 동안 실시했던 행위예술인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은 나를 좋아한다’(I Like America and America Likes Me)이다.

종종 현대미술, 아니 통틀어 현대예술에 대한 난해함은 예술가라는 사람들에 대한 모호함으로 전이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피카소의 작품을 보면서 좋은 그림이라고 깊이 동감하는 데 주저한다. 그런 와중에 보이스를 현대미술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혹은 혁신적인 예술가라고 단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이런 주장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미술을 비롯한 타 장르의 전위적인 당대 예술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보이스는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는 듯이 일찍이 ‘모두가 예술가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은 우리가 ‘한마디 말로’ 예술가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예술이라는 응축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화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가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보고 싶어했던 것은 앤트워프 성당의 루벤스 벽화였다. 지구 반대편이 아니라 매일 지나가는 마을 성당에 걸려 있어도 볼 수 없었던 것이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은 그 경계를 넘어서 바로 우리 앞에 와있다. 그리고 예술가 역시 더 이상 귀족 후원자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분명 예술가들은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가는 ‘상위계층의 상징적 자본을 획득한 불안정한 지식인층’(「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5월자)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일찍이 반세기 전에 보몰과 보웬(Baumol and Bowen)은 예술가들에게 닥친 경제학적 딜레마에 대해 논했다.(『공연예술:경제학적 딜레마』, 1996) 신기하게도 이런 현상은 여전히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다른 산업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정도의 미약한 변화가 일어난다. 국회에서 10년 동안 계류하던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될 수 있었던 이유도 촉망받던 시나리오 작가가 아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쪽지와 함께 주검으로 발견됐던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예술가 그리고 예술이 주는 화려함은 평범한 일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현재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우리, 나의 이야기이다. 창작활동의 결과가 수많은 ‘무제(無題)’와 ‘4분 33초’ 간의 소음의 모습으로 나타나 다시금 거리를 두게 되어도 결국 현재 우리가 그 가운데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스의 말대로 모두가 예술가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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