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는 형식이 지닌 비밀스러움을 좋아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듯 써 내려간 독서일기 『행복한 책읽기』라든가 롤랑 바르트가 유난히도 각별한 사이였던 어머니를 잃고 나서 쓴 『애도일기』 같은 것들이 그렇다. 물론 일기라는 매우 자유로운 형식의, 게다가 대체로 짧은 분량의 단편적인 기록들에서 정제되고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형식 없음을 통해, 삶이란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우며 파편화된 채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정리되지 않을 것만 같은 삶의 조각들을 모아놓은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며 우리는 사소한 일상들이 실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일기를 쓰는 것은 삶에 대한 일종의 애도작업이라고까지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애도가 죽은 이에 대한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처럼, 일기 역시 이미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기록으로서 자신이 상실한 삶의 일정 부분을 애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도란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이자 그 상실이 주는 고통을 잊고 다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디 일기만 그렇겠는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긴 분량의 소설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 역시 그러한 애도작업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시간에 대해, 그 시간동안에 사라지고 있고 사라질 소중한 많은 것들에 대해 그는 그다지도 기나긴 애도사를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애도는 개인적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슬퍼한다는 것은 그 자신들의 삶 역시도 무의미하지 않음을 배우는 공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공적인 사건에 대해 함께 슬퍼하고 그 슬픔을 나누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인식하고, 나아가 그러한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그 고통을 유발하는 폭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불충분한 애도는 함께 슬퍼할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그 사회에 우울증과 무기력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불확실한 삶』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한 것이 그러한 지점이다. 그녀는 9.11사태에 대해 슬퍼하는 것을 억압함으로써 국가적 우울증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죽은 자들의 이름, 이미지, 서사가 공적 재현에서 삭제된 결과,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겪은 상실에 대해 애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200여 일이 지났다. 유족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할 기회조차 박탈 당한 채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세월호 유족들만의 싸움일까. 도대체 세월호를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이 사회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삶’이 가능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시정연설에서 ‘경제’를 59차례나 언급했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이 “저도 부모님을 다 흉탄에 잃어 가족을 잃은 마음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통감하고 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세월호를 악몽으로 기억하게 하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그 심정으로 유가족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 애도해야 할 죽음과 애도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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