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세계 곳곳 '극우' 세력들의 행동역학 ④이스라엘 극우정당

최근 이스라엘 집권 세력의 우경화와 극우 정치인의 부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현 네타냐후 총리 내각의 아비그도르 리버만(Avigdor Lieberman) 외무장관과 나프탈리 베넷(Naftali Bennett) 경제장관이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이다. 옛 소련 몰도바 태생인 리버만은 1999년 러시아계 유대인들을 기반으로 이스라엘 베이테누(Yisrael Beitenu) 당을 창설했다. 세속적, 민족주의적, 극우 성향의 이 당은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세트의 총 120석 중 2003년 7석에서, 2006년 11석, 2009년 15석으로 의석을 늘려 왔으며, 네타냐후 총리의 리쿠드 당과 통합해 선거에 임한 2013년 총선에서는 11석을 차지했다. 리버만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벌거벗은 무력 사용을 주장한다. 또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야 한다는 등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요르단 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에 건설한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로 병합하는 대신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들이 밀집하여 거주하고 있는 요르단 강 서안 인근 지역을 팔레스타인에 넘겨주는 그 자신만의 ‘두 민족 두 국가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나프탈리 베넷 경제장관은 아비그도르 리버만 외무장관보다 오히려 더 이념적이고 극단적이다. 그가 이끌고 있는 하바이트 하예후디(The Jewish Home) 당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섭리로 이해하는 극단적인 유대 민족종교인들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땅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속의 한 과정으로서, 19세기말 시온주의 운동의 시작, 밸푸어 선언,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1967년의 6일 전쟁의 승리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온 영토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유대 민족에게 주셨던 땅(창15:18)이며, 하나님의 섭리 하에 회복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땅을 포기하는 어떤 타협이나 외세(주로 미국)로부터의 압력도 항거하고 거부한다. 바로 이들이 이-팔 평화협상 과정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점령지역 내 유대 정착촌 건설을 주도하고 있으며, 그동안 건설한 정착촌을 철거하는 것이나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넘겨주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하바이트 하예후디 당은 요르단 강 서안과 동 예루살렘 점령 지역의 약 60% 정도를 이스라엘 영토에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두 민족 두 국가 해법’, 즉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 자체를 반대한다.

▲ 사진① 요르단 강 서안에 위치한 이스라엘 정착촌

이와 같이 종교적, 이념적 정체성이 강한 집단에 기반을 둔 베넷이지만, 그는 세속적이고 서구화된 이스라엘 주류 엘리트 집단에도 지지 기반을 확장할 수 있는 개인적인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청년들이 선망하는 싸예레트 마트칼 엘리트 특공대 장교로서 1982-2000년 남부 레바논 전쟁에 참여했으며, 2006년 헤즈볼라와의 전쟁 시에는 예비역 장교로서 레바논 전투에 투입되었다. 안보가 중시되고 병영화 된 국가 이스라엘에서 그의 군 경력은 이스라엘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군 제대 후 히브리대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보안 소프트웨어 분야 하이테크 벤처회사를 창립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06년 정계에 진출한 그는 네타냐후 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일했으며, 요르단 강 서안 점령지역의 유대 정착촌협의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나프탈리 베넷은 또 기성 정치인들에게서 보기 드문 이스라엘 특유의 신세대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언론과 방송에서의 이스라엘 기성 정치 지도자들과의 방송 토론에서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공격으로 유권자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다. 그가 이끌고 있는 하바이트 하예후디 당은 베넷의 활약 덕분에 2013년 1월 총선에서 12석을 획득하여 2009년 당시 의석을 9석이나 늘렸던 것이다. 리버만의 이스라엘 베이테누 당의 11석과 베넷의 하바이트 하예후디 당의 의석 12석을 합한 23석은 네타냐후 총리 소속 당 리쿠드의 20석 보다 3석이나 많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이-팔 평화협상 타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별 진전을 보일 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경우 집권 과정에서는 강경한 이미지의 극우 정치인으로서 집권에 성공했으나, 집권 이후 온건파로 변신한 몇 명의 사례를 볼 수 있다. 메나헴 베긴, 아리엘 샤론, 그리고 베냐민 네타냐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메나헴 베긴의 경우 강경한 이미지의 극우 정치인으로 197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후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타결해,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그 공로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아리엘 샤론 전 총리 역시 이런 측면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1970년 대 요르단 강 서안, 가자 그리고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 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주도했다. 샤론은 그가 국방장관으로서 주도했던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샤브라-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사건과 관련해 이스라엘 대법원에 피소된 바 있다. 2001년 샤론은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유혈 폭력사태와 안보위기 하에서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했으나 2005년 온건파로 변신하여 자신이 건설했던 가자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을 모두 철거하고 가자로부터 이스라엘 군을 철수 시켰다.

▲ 사진② 정착촌과 보안장벽

아리엘 샤론 총리가 2001년 선거에서 노동당 예후드 바라크 총리와 경쟁해 63% 득표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바라크 총리가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의 최종지위협상에서 유대 정착촌과 이스라엘 점령지역 철수 문제, 동 예루살렘의 지위 문제 등 중요 사안에 대해 이스라엘 유권자 편에서 보면 팔레스타인 측에 파격적인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대규모 시위와 유혈 테러로 반응하자, 팔레스타인 점령지역 포기의 대가로 유혈 테러 대신 안보와 평화를 기대했던 이스라엘 유권자들은 크게 실망하고 힘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측에 많은 양보를 하지 않고도 이스라엘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극우 성향의 샤론 당수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성전산(Temple Mount, 아랍명: 하람 알-샤리프 Haram al-Sharif)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 불인정, 이스라엘 아랍인들의 이스라엘의 탈 유대화 주장, 알-아크사 인티파다의 발생 등 일련의 사태 전개는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위기감을 안겨 주었다. 이런 극심한 안보 불안과 위기감이 물리적인 힘을 앞세운 극우 정치인 샤론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힘을 앞세운 군사적인 수단으로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을 통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현실적인 제약 가운데 이-팔 갈등 해결을 위한 가용 정책대안의 한계에 직면했던 샤론 총리는 2005년 9월 13일 가자지구로부터 유대인 정착촌과 이스라엘 군을 완전 철수시켰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38년 동안 지속됐던 이스라엘의 군정을 종식시킨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 간 고질적인 분쟁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극우 정치인들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 과격세력을 양산하고 있다. 또 역으로 하마스와 같은 정치이슬람과 민족주의적 유대교는 팔레스타인 땅과 성전산을 신성화 시키고, 이 양측 간 갈등을 악화시키고 있다. 

▲ 최영철 교수
장신대 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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