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혜인 강사
동양화과

강의를 하면서 나의 대학생활과 현재 대학생들의 삶이 오버랩될 때가 종종 있다. 20대의 젊음은 당돌하면서 한없이 불안하지만 날카로운 아름다움으로 눈이 부시다. 인간은 더 나은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간다고 믿지만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과연 인간의 사고가 더 진화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현재의 대학생들이 조금의 심심함도 견디지 못하고 스마트폰에 시선을 꽂고 있을 때다.

전철 안에서,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앞에 상대가 앉아있음에도, 심지어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인하여 상대의 눈을 마주보고 주변을 살펴보는 이들이 드물다. 어린아이처럼 조금의 심심함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심심함이란 것은 일종의 사고의 여유분이다. 길가 정류장에서 가로수를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버스가 오지 않을 때의 심심함과 무료함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시작된다. 햇빛에 반사되는 나뭇잎의 여러 가지 색들에서 새삼스럽게 초록의 다양함을 느끼고 둔중한 밑둥에서부터 날렵한 나뭇가지까지 나무에서 느껴지는 경쾌한 비례미, 나뭇결의 패턴 등등 시각적인 것들이 먼저 보인다. 도시의 매연 속에서도 살아가는 처연하면서도 숭고한 생명력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이 이어지며 사물과의 내밀한 대화가 시작된다. 한참 시선이 오고가면 사물과 나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는 회심(會心)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이렇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심심함’, ‘무심’의 상태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시선의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그림에서 드러난다. 현대 회화에서 재료의 범위가 광범위해져 표현 재료로 동, 서양 회화를 단순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는 각기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예를 들어 동양에서는 자연을 인간과 공존하는 대상으로 경외시한 반면 서양에서는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정복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의 차이로 동양에서는 자연스럽게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를 감상하고 서양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물을 조절하는 ‘분수’를 감상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은 관계 속에서 가변적인 성향이 있다. 정해진 규격의 가방보다 한 장의 보자기에 많은 짐이 들어가기도 하고 침대보다 바닥에 까는 요에 의외로 많은 이가 누울 수 있다. 원근법에 의해 소실점이 등장하고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적인 서양화법과 달리 동양 회화에서는 화면에서 순간적인 빛과 그림자로 구분되지 않는,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사물의 정신을 추구하였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낳고 이것이 문화의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흥미롭다. 누군가 인간이 그리는 무늬가 ‘인문(人文)’이라 하였는데 이런 인문의 시각화가 시각 예술인 것이다.

시각예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물질’을 다루는 것이다. 형이하학적인 물질로 형이상학적인 정신을 드러내는데, 고대의 동굴 벽화(돌), 토기(흙)에서부터 금속, 종이, 천, 플라스틱, 유리, 컴퓨터 등등의 물질로 만들어진 예술품들이 삶의 ‘증거’가 돼 박물관, 미술관에 남아 우리는 시, 공간을 교차하며 옛 사람들과 교감을 한다.

상상하고 표현하는 능력은 기억하고 생각하는 능력과 함께 인간만이 가지는 일종의 선물이다.

인간과 주변 사물간의 관계가 소유나 쾌락을 넘어 바라보고 공감할 수 있다면 이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축복이자 자산이다. 물질적 재산은 있다가도 없어지지만 이런 내적 자산은 줄지 않고 오히려 쓰면 쓸수록 늘어난다. 만물이 바삭거리며 겨울을 준비하는 찬란한 관악의 가을에서,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심심함을 즐기면서 혼자서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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