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유희, 발칙하고 불온한 이야기를 나누자!
환상과 유희, 발칙하고 불온한 이야기를 나누자!
  • 김지윤 기자
  • 승인 2014.11.15 2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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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박형서 소설가
▲ 사진제공: 박형서 소설가
삽화: 정세원 기자 pet112@snu.kr

근 2000년대 초반,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한국 문학의 사례를 거론하며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다. ‘문학은 끝났지만 소설책은 계속 써진다’는 진단을 받았던 한국 문학은 리얼리즘으로 생생하게 사회적, 정치적, 근본적 인식을 말하는 역할을 다른 매체에게 내어주며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했다는 선고를 받았다. 소설은 더 이상 새로운 문학을 낳지 못한 채 일상에 함몰된 이야기만 생산하는 좀비와 같은 소비 상태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가라타니 고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중략)…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어느 쪽이든, 아침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작가의 말」)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종언의 반대편에서 근대문학 이후의 방향을 고민하는 박형서 작가가 서있다. 고양이에게 애인을 뺏기고 국물용 멸치가 냉장고를 탈출하는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 그는 다양한 서사 방식을 넘나들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근대문학의 사망선고에 그는 밤과 새벽이 닿은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수 있는 때라고 말하며 글을 통해 그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과 자연물의 경계를 초월하고 변신과 죽음, 순환과 설화를 무대에 세워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는 그의 소설은 근대문학의 죽음에 대한 형형한 반증이 되고 있다.

문학의 침체기를 거쳐 등장한 2000년대 문학은 ‘새로움’으로 대변된다. 일탈의 쾌감을 놀이로 삼고 모든 주류적인 미학을 해체하는 것이 오늘날의 문학의 가능성으로 제기된 가운데 그 중에서도 전복적인 상상력을 통한 환상성의 구현은 박형서라는 작가의 이야기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젊은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건 쇠 그물 위에 시멘트를 들이부을 때였다. 덮여가는 개울 완만한 굽이굽이 마다 뾰족한 비명이 핏물처럼 튀어나왔다.
-(「나무의 죽음」)


「나무의 죽음」에서 백발 노인과 붉은 애송이는 영면리의 진입로 건설을 계획한 군청에 봉명산과 영유강의 기가 끊기면 안 된다는 민원을 넣는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각각 산과 내천의 정령이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환상성은 황천으로 가는 저승길이 춘천 인근에 존재하거나(「노란 육교」) 아버지의 환영이 길에서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닦고(「정류장」) 찡쭉이란 도마뱀과 대화하며 단편적 환각에 젖어드는(「새벽의 나나」)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며 상투적이지 않은 비유를 낯설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는 “문학적 개성은 원래 대상과 비유의 결과물 사이의 거리를 통해 알 수 있다”며 “나는 이야기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간의 거리를 멀게 두는 편”이라고 말했다.

현실이 상상력을 통해 환상과 겹쳐진다는 점에서 박형서 작가의 작품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환상성과 자주 빗대진다. 현실과 환상의 접경에서 자연스레 정령이나 유령이 출몰하고 시간과 공간이 순서를 잃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가 그의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환상성이란 원래부터 문학의 핵심성분이자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보편적 성향”이라며 “환상적인 소설을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등가로 보는 건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문학의 환상성은 애초에 수많은 근원에서 출발해 뒤섞인 강물과 같으며 한 잔의 물속에서 각각의 지류를 구분해 말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성과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등장하는 환상성은 완전히 같은 게 아니며 그는 “두 가지 환상성은 각기 에덴동산에서 한 날 한 시에 쫓겨난 친척”이라고 비유했다. 서로 닮을 수밖에 없고 상호 텍스트 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한 가지로 묶일 순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즐겨 사용하는 패턴이 있다면 그것은 곧 게으름 혹은 선입견의 침식작용이라 여겼던 것이다. …(중략)… ‘박형서적’인 뭔가가 등장하지 않았고 등장할 때도 아니다. 계속해서 탐험을 해야 한다.
-(「어떤 고요」)


애초에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환상성은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익숙한 원칙에서 탈피해 끊임없이 다른 패를 내고자 하는 작가의 치열한 창작은 끊임없이 자신이 표현했던 기존의 환상과 다르게 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작품이 어떤 류의 환상성으로 정의될 수 없음을 말한다. 작가 고유의 상상력으로 표현의 영역을 넓히며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는 것,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독특한 표현마저 다시 낯설게 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환상성을 예측불허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문학의 힘

작가는 신선한 설정과 묘사를 통해 이야기 자체가 문학에서 갖는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그는 “특정 메시지를 위해 부역하는 것은 문학의 올바른 자리가 아니다”며 “인간이 지닌 원초적 즐거움으로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살아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발화된 하나의 이야기에 아무런 의도도 담지 않을 수는 없지만 문학은 정치적 구호처럼 메시지에 매몰되면 안되며 이야기의 힘으로 작가의 생각이 느껴지게 해야 한다. 그는 “이야기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깨닫는 순간 빽 소리를 지를 정도의 충격을 받는다”며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에 더 깊은 자욱을 남긴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이야기 자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의 작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해지는 것들의 숙명이나(「노란 육교」) 사랑의 본질인 집착과 왜곡(「끄라비」)과 같이 일상에선 잊히기 쉬운 근본적인 화두를 던진다. 이와 같이 삶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려는 그의 소설은 결국 근원적인 ‘외로움’에 가닿게 된다.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오랜 이미지와 고정관념에 가려져있던 삶의 본질을 새삼 깨닫게 한다. 스스로 이를 두고 “경험에서 배운 것이라기보단 소설가들이 갖는 일종의 직업병일지 모른다”고 토로했다. 새로운 법칙을 밝혀내는 건 문학이 아닌 과학이며 문학은 “너무 빤히 알고 있는데 있는지조차 깜빡해버린 어떤 것에 주목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문학이란 이야기라는 언어를 통해 삶을 삶으로 인지시키는 숙명을 타고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에게 있어 이야기의 사명은 “모두가 받아들인 원칙을 타격하고,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며 굳건한 공동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제 내 집에는 조금의 풀이나 화초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풀이나 잡초를 갉아먹을 아무런 존재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내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그는 이 외로움에 대해 “목숨 걸고 지켜낼 것이 없는, 모든 것이 변하며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이 반복되는 사소한 갈등이 지루해서 느껴지는 부질없음”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삶과 시간과 우주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염세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부연을 덧붙였다.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에서 사랑 없는 공허함 끝에 죽은 토끼처럼 ‘끅’ 하고 죽어버린 아내의 최후가 삶의 맨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공허감을 대변한다.

은근히 겁주고 얄밉게 웃다가 말 돌리고, 상대가 모르는 예를 들면서 정신없이 들이대고, 무턱대고 말허리를 자르더니 갑자기 반말하면서 몰아세우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딴청을 부린다.
-(「논쟁의 기술」)


다만 박형서 작가는 심각한 어조로 이야기를 건네거나 교훈적 목적으로 풍자를 하지 않는다. 그는 본질을 마주해야 하는 외로움을 장중한 주제가 무색해지는 농담으로 승화시킨다. 「논쟁의 기술」에서 작가는 새로운 통찰이나 서정성의 공유와 같은 최소한의 주제의식도 벗어던진 채 가벼운 딴청을 부리는 자신을 은유한다. 논쟁의 대상이 “피범벅이 되어 떡볶이마냥” 나뒹굴어도 작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뭐가 그리 심각한가?(Why so serious?)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에서 화자는 논문 형식을 이용해 문학비평을 편협한 해석이라고 조롱하면서 동시에 그 자신도 작품을 ‘음란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스스로조차 놀이의 대상으로 만든다. 박형서의 이야기는 사회현실을 풍자하는 방식이 아닌 유희와 도발을 통한 희극성의 맥락에서 더욱 돋보인다.

비판적인 공격보단 해학을 보이는 작품의 유희성은 앞서 언급했던 환상성과 마찬가지로 현대 문학의 새로움을 나타내는 특징 중 하나다. 문학평론가인 미하일 바흐친은 “웃음은 진지성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위대한 문학 속에 들어올 수 있다. 세계의 어떤 본질적인 면은 오로지 웃음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 엄숙하고 처절한 서사가 아닌 허구성과 놀이를 통한 웃음을 하나의 관점으로 제시하며 박형서 작가의 이야기가 가진 유희적 위반은 전복적 상상력과 더불어 독자들에게 쾌감을 주며 현대문학의 새로움을 배가한다. 그의 고유한 환상성만큼이나 근본적 문제에 유희적으로 접근하여 문학에 새 숨을 불어넣는 일탈은 주목할 만한 재능이다.

소설가로서 박형서 작가는 “보다 과격하고 보다 무모하게 이런 저런 서사적 경계들을 넘보고 뒤집어보고 부수겠다”고 말했다. 욕을 먹거나 곤란해지는 한이 있어도 후대의 작가들이 자신에게 빚지게 되는, 좀 더 자유로운 이야기 마당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문학적 야망이라고 밝히며 그는 “불온하지 않은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삶의 밑바닥을 논하면서도 이야기를 유희하는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현대 문학의 언어와 한국소설의 ‘자정’을 생각해본다.

“소설이란 기본적으로 대답의 양식이 아니라 질문의 양식”이라는 박형서 작가의 말처럼 모든 경계를 허물고 의식을 흔드는,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근원적 의문을 던지는 작가의 더욱 다채로운 문학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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