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신해철 2집이 나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몰랐지만, 그의 노래에 흠뻑 빠져들었다. 「째즈카페」로 시대의 변화를 짚어내고 「길위에서」로 젊음의 고뇌를 말하던 20대 초반의 그는 「50년 후의 내 모습」을 노래했다. “노후연금 사회보장 아마 편할 수도 있겠지만”, “벤치에 앉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긴 싫어.”

노인에게 주어진 역할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기우였던 듯하다. 70대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단순히 요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의 변화를 주도한다. 김구에 대한 혁신적인 역사 해석이 등장하고, 저출산 대책으로 ‘싱글세’라는 창조경제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창의적 방안이 제시된다. 그런데, 노인들이 편할 것이라는 예측 역시 크게 빗나간 것 같다. 노인 자살율 OECD 1위인 한국은 노인 빈곤율 역시 평균의 3배에 달하는 압도적 1위이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가난해지고 있지만, 복지 부정을 엄벌하겠다는 정부 방침 속에 기초생활수급자는 매년 20만 명씩 줄어들고 있다. 노인들을 위해 최대 20만 원의 기초연금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기초생활수급자들은 받지 못한다. 거리에서 폐지를 주워야 하고,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며 밤샘 경비를 서야 한다. 그마저 못하는 이들은 예의 바른 쪽지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 삽화: 최상희 기자 eehgnas@snu.kr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노인들만 비극적 처지인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창업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쥐를 죽여 포장판매하던 여고생이 자살하고, 2년만 지나면 정규직이 되리라는 기대로 성폭력을 인내하던 계약직 직원은 해고와 함께 죽음을 선택했다. 산재사망율 압도적 1위인 한국은 굴지의 대기업들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귀족 노동자 때문이면 차라리 좋으련만. 비극적 풍경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5년동안 25명의 죽음과 함께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끈질긴 노력 끝에 해고의 근거가 됐던 기업회계가 조작됐음을 밝혔다. 평생 차만 만들던 노동자들이 숫자를 들여다보고, 많은 전문가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정리해고는 정당하다며 결과를 뒤집는다. 근거야 어찌됐든 해고는 경영진이 판단하기 나름이라는 혁신적인 판결이다. 이제 더는 논리나 명분이 필요 없는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강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왜나하면 강자니까.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다양한 지옥이 있다.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따라 다른 고통에 처해진다. 그런데 관리하는 입장에서 보면, 지옥을 여러 개 만든 것은 탁월한 통치술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여건이 좋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만족해하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좋은 지옥 하나를 망가뜨려 불만을 잠재울 수도 있겠다. 국민연금의 보장 수준을 높이는 대신 공무원 연금을 그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정부의 개혁이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처럼.

일터의 수많은 죽음에서부터, 면접 자리에서 사상검증에 응해야 하는 ‘취준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음’에 사로잡혀 있다. 저마다의 자리가 다를지라도, 장그래가 오과장이 된다한들, 모두 자신들이 어찌 할 수 없는 조건이 지배하는 같은 공간에 있다. 어쩌면 해결책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음을 거부하는 것. 주어진 논리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 ‘카트’를 함께 미는 그 ‘송곳’ 같은 순간들. 비록 그 순간들이 너무나 간헐적이어 보잘 것 없을지라도, 번쩍이는 섬광은 어둠을 뚫고 진실을 보여주기에.

기다란 숟가락일지라도, 서로 떠먹여주는 순간, 지옥이 곧 천국이듯이.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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