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하 교수
불어교육과

어느 때부터 빅데이터라는 말이 들린다 싶더니 빅데이터 연구소가 생기고 연구방법과 활용에 대한 논의들이 심화되고 있다. 인간 군상의 행태와 흔적들이 남김없이 기록돼 계량화되면 사람들 사는 꼴이 개미떼의 움직임처럼 훤히 들여다보이게 된단다. 뭇사람들의 취향이나 무의식적인 행동양식 등을 샅샅이 파악하게 되면 상업적 용도에 두루 쓰일 것이다. 또 상품의 생산이나 소비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나 문화, 정치적 성향 등을 포괄하는 집단성에 대한 지식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포획해 유혹의 덫을 놓거나 개인의 선택마저 집단성의 변수로 환원하고 감시하는 거대한 기록 장치로 작동하리라는 두려움이 생기는 데에도 까닭이 없지는 않다.

빅데이터의 개념을 보면서 어느 결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이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에서 전체주의의 전횡이 개인의 존엄성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말살시키고 노예화하는지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다. 그 소설에서 사람들이 거대한 체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빅 브라더의 존재 때문이라기보다도 사람들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 때문이다. 사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글귀는 우리의 주변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면서 일상화된 지 오래다. 감시카메라를 두고 일었던 사생활 침해의 논란들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잠재적 피의자인 개인들은 다만 자기예외성의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오웰이 상상했던 마이크로폰과 같은 스마트폰은 개개인들을 거대한 통신의 망 속에 연결시키고 있으니 상상 속의 미래 1984년은 아니었다 해도 2014년 오늘에 와서는 미래의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를 위한 장치가 완성된 듯하다.

빅데이터는 인간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더불어 미처 조직화되지 못한 기계화의 효율을 높여줄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이런 이해가 인간의 개별성과 자유 의식을 그만큼 침해하리라는 것도 명확하다. 오웰이 그린 전체주의 체제는 폭력을 통한 지배가 정당화된 곳이어서 주인공은 결국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멸의 집단적 두뇌가 어떻게 오류를 범할 수 있겠는가? 어떤 외적 기준으로 그들의 판단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정신 상태가 온전하다는 것은 통계에 의한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이 시대는 물리적 폭력은 아니지만 어쩌면 더 정교한 유혹의 기호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집단적 두뇌’와 ‘통계’는 필시 빅 데이터의 핵심 개념일 것이기에 소설가가 펼쳐 보인 상상을 과학이 실현해낸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인간의 유적 보편성은 벗어날 수 없는 일이고, 더욱이 빅데이터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주리라 기대해보면 결국에는 지식과 관계를 맺는 개개인의 자각에 책임을 묻게 된다. 개별적 인간을 예외적 우연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로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이제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며 불변의 기록들이 제시될 것이고 비단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이 순간도 이중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스마트폰에서 주고받은 기록들도 그 내밀성을 온전히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 개인의 사적 공간과 자유의 확보가 큰 과제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처럼 낡은 공책에 일기 쓰기라도 시도하면 될까. 아니면 스마트폰 없이 사랑의 밀어라도 속삭이면 될까. 개인의 고유성이야말로 허상이고 결국에는 도도한 시대의 흐름에 누구나 떠밀려가는 것이 실상이라고 하더라도 자유는 개인의 자기의식을 반항의 근거로 삼고 배반 당한 체제에 대한 혁명의 꿈을 간직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자유는 억압의 의식과 자유에 대한 꿈이라는 그 일탈을 통해서 먼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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